“좋아해, 가람아”

 

 

 그 후로도 변한 것은 없었다. 그저 잔잔한 하루들의 연속이었다. 은찬은 여전히 조용한 눈빛으로 가람의 뒷모습을 쫒기에 바빴고, 가람은 그 눈빛의 의미를 알고 있음에도 평소처럼 은찬을 대했다. 은찬의 행동에 과하게 반응하지도 않았으며 부러 모른 척 하지도 않았다. 은찬은 그런 가람을 보며 가만히 웃을 뿐이었다. 은찬의 고백 아닌 고백은 평소와 같은 하루의 한 조각이었다는 듯이, 하루는 그렇게 흘러가고, 흘러갔다. 현우와 건, 넷이 함께 부대끼며 여느 날처럼 투닥거리는 날들이 계속 되었다. 그 행동들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둘의 사이엔 어떤 미묘함도 자리 잡지 않은 듯 보였다.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지만.

 

 달빛이 길 곳곳에 내렸던 날 밤, ‘산책 다녀오지 않을래?’하던 은찬의 말에 길을 걷다 발견한 곳은 놀이터였다. 밉지 않은 쇳소리가 나는 그네에 앉아 하얀 입김을 내뱉던 가람은 좋아해,라는 은찬의 말에 그제야 눈을 맞추었다. 조용하다 못해 고요했던 장면 중에서 유일하게 일렁이던 눈동자를 한참이고 바라보던 가람은 그저 ‘가자’며 발을 땠을 뿐이었다. 좋아한다 말하던 은찬의 눈은 한치의 거짓도 없었다. 가람은 그런 은찬의 눈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고,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찬이 마음을 고백하던 날 이후로 둘의 사이에 변한 점이 있다면 둘이 함께일 때만 묘하게 바뀌는 가람의 행동이었다.

 

 

 

 

 

 

 

 

 

일상, 평온의 나날

 

 

 

 

 

 

 

 

 

 

“뭐야, 왜 안자고 기어나와 있어?”

 

 

 가람은 툇마루에 나와 앉아있는 은찬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맨발아래 닿는 마루가 마냥 차가웠다. 가람이 은찬의 대답을 기다리며 팔짱을 꼈다. 여전히 내려다보는 표정이었지만 은찬은 그런 가람이를 올려다보며 웃어주었다.

 

 

 

“그냥, 잠이 안와서. 가람이 너는?”

 

“나도 그냥. 잠이 안와서”

 

 

 

 은찬은 그런 가람을 보며 우리 통했네,하며 웃었다. 그날과 같은 둥근 보름달이 비치는 밤이었다. 구름 한 점은 커녕, 별도 보이지 않도록 달이 밝은 밤이었다. 가람은 그새 자신에게서 시선을 거두는 은찬을 보다 멀지 않은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은찬이 앉아있는 모습 그대로 다리는 마루 아래로 내리고 양 팔을 제 옆으로 뻗어 몸을 기대었다. 은찬은 제 곁에 앉는 가람을 느끼곤 마루 아래로 내린 두 다리를 동동거렸다. 날이 제법 차다, 그렇지, 가람아? 이제 곧 겨울인가 봐. 은찬은 아리도록 밝은 달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가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은찬은 움직이던 다리를 멈추곤 대답이 없는 가람을 바라보았다. 가람은 은찬을 바라보던 시선이 맞닿자마자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앉은 거 똑같아, 은찬은 생각했다.

 

 

 

“엄마새 따라하는 아기새 같잖아”

 

“뭐?”

 

“아냐~”

 

 

 

 아, 할 말이랑 생각이랑 반대로 해버렸다.

 

 당황해 어물쩡 넘어가는 은찬의 말에 가람은 얕게 인상을 찌푸렸으나 굳이 자세를 바꾸진 않았다. 은찬의 말에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한 번 내려다보았을 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둘은 한참이고 그렇게 앉아있었다. 제법 찬바람이 둘의 사이에 맴돌았으나 옅게 느껴지는 온기에 춥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은찬은 고개를 까딱이며 흥얼대다 맑기만 한 하늘을 보며 가사를 입혀갔다.

 

 

 

“네가 숨쉬면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네가 웃으면 눈부신 햇살이 비춰. 여기 있어줘서 그게 너라서 가끔 내 어깨에 가만히 기대주어서. 나는 있잖아 정말 빈틈없이 행복해. 너를 따라서 시간은 흐르고 멈춰.”

 

 

 

 가람은 은찬의 목소리에 마루아래에 두었던 다리를 끌어모아 안았다. 은찬의 노래가 이어질수록 가람은 두 무릎 사이에 제 얼굴을 묻었다. 무릎 위에 이마가 닿아 얼굴이 가려졌다. 은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노래를 이어갔다.

 

 

 

“물끄러미 너를 들여다보곤 해.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너의 모든 순간, 그게 나였으면 좋겠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차올라 나는, 온통 너로.”

 

 

 

 은찬의 노래가 끝나고도 가람은 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졸린걸까,하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뻗은 은찬이었지만 갑작스레 일어나는 가람의 행동에 은찬은 가람을 또 올려다보았다. 가람은 입술을 앙다문 표정이었다. 아, 귀가 빨갛다. 추웠나? 은찬은 가람의 표정을 읽으려 노력하지는 않았으나 다른 곳과 달리 새빨간 귀가 눈 안에 들어왔다. 추워? 그럼 그만 들어가자.하며 말을 하려 입을 때려는 찰나,

 

 

 

“나도”

 

 

 

 하고 방으로 휘적휘적 들어가는 가람을 보며 은찬은 미닫이문이 열리고 닫길 때 까지 그저 가람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가람의 말을 이해한 은찬은 가람이 했던 것처럼 두 다리를 끌어모아 안고 고개를 묻었다. 그래서 귀가 빨갰구나, 귀여워…. 은찬은 제 무릎 위에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부비대었다. 가람의 머릿속이 들여다보일 것만 같았다. 이상해, 두근거려. 이게 뭐하는 거야? 들키고 싶지 않아, 그치만…, 좋아. 은찬은 웃음을 터뜨리며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가람이가 정말 이렇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

 

 

 

 

 

 학교를 가는 은찬과 학교를 가지 않는 현우 덕에 은찬과 가람만이 있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중앙에 백은이 오던 날 처럼, 건이 현우와 함께 나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중앙에 오롯이 둘만이 남는 경우는 드물었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여자들이 아닌데도 둘만 있는 시간은 턱없이 적었다. 그에 이렇다한 불만을 토로하는 둘은 아니었으나 둘만 있는 시간을 마냥 버리지도 않았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나른한 휴일,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가람은 잠이 들어버려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은찬을 두고 현우와 건의 앞에서 좀 떨어진 곳의 마트에서 하는 세일을 놓치면 안 된다고 닦달을 해댔다. 그 결과 현우와 건은 입을 주욱, 빼면서도 중앙을 나섰고 황순할멈도 옆집에 마실을 나가 가람은 간만에 조용한 주말 저녁상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보글보글 대며 찌개가 끓어오를 무렵, 마지막에 넣을 야채를 손보던 가람의 허리 사이로 팔이 감겼다. 그에 놀라 헛손질을 할 뻔 했던 가람은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곧 제 어깨에 내린 은찬의 얼굴 덕에 멍하니 떠있는 손만을 내려다보았다.

 

 

 

“뭐야, 자는 거 아니었어?”

 

“깼어…, 방금. 응, 방금….”

 

 

 

 아직도 잠에 취한 것인지 횡설수설해대는 은찬을 그렇게 두고 가람은 썰던 재료를 마저 썰기 시작했다. 가람의 어깨에 이마를 대곤 가만히 숨을 고르던 은찬은 가람의 어깨에 턱을 괴고는 가람이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통, 통, 통 하며 썰리는 애호박은 굵기도, 크기도 일정했다. 신기하단 말야, 나랑 같은 나이인데 솜씨는 주부급이라니까. 가람의 손 아래에서 썰어지는 야채들을 바라보다 은찬은 가람을 조금 더 꽉 끌어안고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야.”

 

“…….”

 

“주은찬”

 

“…음…, 방해 돼?”

 

 

 

 여전히 낮게 잠겨있는 은찬의 목소리가 가람의 귀 아래에서 울렸다. 가람은 야채를 썰던 손을 우뚝 멈추었다. 여전히 반쯤 잠에 취해 색색대던 은찬은 규칙적으로 들리던 도마와 칼이 맞닿는 소리가 멎은 것을 보곤 방해가 되었나 싶어 고개를 들며 가람의 허리에 감았던 손에 힘을 조금, 풀었을 때였다.

 

 

 

“또 해봐 그거”

 

“…응?”

 

“그때…, 밤에 했던….”

 

 

 

 …노래….

 

 점점 사그라드는 목소리로 가람은 말했다. 그 덕에 은찬은 가람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곱씹어 생각해 보아야 했다. 밤에 했던? 노래? 아직 덜 깬 정신을 불러오려 머리를 두어 번 털어내고 나서야 가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됐다. 노래를 불러달라고 한 거야? 가람이가? 그제야 놀라 잠이 깬 은찬은 고개를 돌려 가람을 바라보려 했으나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 건가 싶은 가람이 손을 먼저 움직였다. 통, 통, 통 또 규칙적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글보글 대는 찌개소리도 부엌의 정적을 채웠다. 은찬은 제 귀에 닿은 가람의 귓가에 따끈히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작게 웃었다. 아, 귀엽다니까. 은찬은 가람을 다시 꽉 안고는 가람의 어깨에 다시 턱을 괴었다.


 

 

“아무리 조심해도, 애써도. 아무리 아닌 척 밀어내도 이미 난 네가 좋아. 보고싶다, 달려간다, 두드린다, 넌 놀라 웃는다. 동그란 웃음 온 세상 다 어루만진다. 울지마라 가지마라 이제는 머물러라, 내 곁에. 넌 따뜻한 나의 봄인걸.”

 

 

 

 은찬의 목소리가 이어지며 가람은 썰고 있던 손짓을 멈추었다. 바짝 안아 맞대어진 몸 때문에 은찬은 가람이 숨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길게 들이쉬고 내쉬어지던 호흡은 은찬이 내 쉬는 호흡에 맞추어 변해갔다. 같은 템포로 호흡을 하며 은찬은 웃었다. 가람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으나 움직이지 않고 있는 손만으로도 가람의 표정이 눈 앞에 그려졌다.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제 노래를 듣고 있을 가람을 생각하니, 은찬은 가슴 한 구석이 빠듯해졌다. 아니야, 조금 더 좋아해주고 있으면 좋을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은찬은 가람의 몸에 닿는 손끝으로 가람의 배를 가볍게 쓸었다.

 

 

 

 “아직 망설이는 네 마음 앞에 그래도 멈추지 못할 내 마음. 내게 남은 두려움, 너를 안고 안아 내 품이 편해질 때까지. 울고 있다, 참고 있다, 고갤 든다, 아프게 웃는다. 노을 빛 웃음은 온 세상 물들이고 있다. 울지마라, 가지마라, 이제는 머물러라 내 곁에. 넌 따뜻한 나의 봄인 걸.”

 

 

 

 가람은 숨마저 죽이곤 은찬의 노래를 들었다. 은찬의 노래를 들을 때면 가슴 한 구석에 간질거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래도 듣고 싶었다. 노래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야채를 썰던 손을 앞치마 앞에 가볍게 닦아내곤 제 허리에 감겨있는 은찬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그 동작에 맞추어 가볍게 웃는 은찬의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마침내 만나게 된 너는 나의 따뜻한 봄이다.”

 

 

 

 자글자글 끓고 있던 찌개는 어느새 바닥을 내보이며 끓어올라 있었다. 하지만 가람은 불을 끄지도, 물을 더 넣지도 않았다. 은찬의 노래가 끝나고도 한참 후 까지 가람은 은찬에게 안긴 그대로 기대어 있을 뿐이었다. 조금 불규칙해진 숨소리가 들릴까 가람은 은찬의 있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큰 숨을 내쉬었다. 은찬은 그런 가람을 보곤 다시금 웃으며 져지 사이로 애타게 보이는 목덜미에 입술을 내렸다.

 

 움찔, 하는 가람에 은찬은 웃으며 가람의 귀 아래 입을 맞추곤 안고 있던 손을 풀어 가람을 돌렸다. 은찬의 머리칼만큼이나 빨개진 얼굴을 한 가람은 은찬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여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가람을 웃으며 바라보던 은찬은 두 손을 올려 가람의 뺨에 대곤 가람의 시선을 제 앞으로 끌어왔다. 순간 마주친 눈에 은찬은 눈이 휘어지도록 웃었다. 가람은 화끈거리기까지 하는 두 뺨을 느끼며 눈을 꽉 감았다. 그 새 가람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마주 댄 은찬은 쪽,소리가 나게 떨어지고 나서야 손을 내려 가람의 양 손목을 잡았다.

 

 

 

“가람아, 눈 떠봐”

 

“…싫어.”

 

 

 

 가람은 여전히 눈을 꽉 감고 인상을 썼다. 그게 그렇게 부끄럽나. 빨개져 눈을 꽉 감은 그 얼굴이 마냥 사랑스러웠다. 가람이도 나랑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운거지? 마냥 귀엽다는 얼굴로 가람을 바라보던 은찬은 다시 한 번 가람의 이름을 불렀다. 가람아, 가람아, 청가람. 그제야 슬쩍 눈을 뜬 가람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가람이 애를 쓰며 바라보는 은찬의 입술은 다시금 움직였다.

 

 

 

“좋아해, 가람아”

 

 

 

 가람은 은찬에게 붙잡혀 있는 두 손목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대답했다.

 

 

 

“나도. 좋아해…, 주은찬.”

 

 

 

 

 

 

 

 

 

*

 

은찬이가 부른 노래는 순서대로 '성시경님의 너의 모든 순간', '너는 나의 봄이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