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굴레차!/은찬가람 | Posted by 윤새벽 2016. 7. 3. 02:50

[은찬가람/찬가람] 여름비

 비가 지독히도 내린다.


'나는 커서 가람이랑 결혼할거야!'


 그것은 작았던 네가 늘 입에 달고 살던 말이기도 했다. 그다지도 해맑게 웃으며 말을 붙여오는 너를, 나는 귀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딜 가도 눈에 띄는 빨간색 머리의, 시끄럽게 말을 붙여오는 옆집 애. 후두둑, 빗방울들이 거세게 창가를 두드렸다. 그 소리가 귓가를 뱅뱅 맴돌았다. 오늘부터 장마니 우산을 챙기라던 엄마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창가를 시끄럽게 때리는 빗방울들을 보고 있자니 꼭 저 소리만큼 이야기를 쏟아 붓던 어린 시절의 네가 떠올랐다. 나이를 물어보면 한 손을 쫘악 펼쳐 대답했던 그때의 우리를.

 너는 옆집에 이사 온 남자아이였다. 저보다 작은 여동생을 데리곤 두 손바닥 가득 흘러넘칠 듯 한 접시를 문 앞에 내밀며 문 틈 사이로 너를 훔쳐보던 나와 눈을 마주쳤던, 늘 웃고 다니던 남자애. 너의 첫인상은 그걸로 끝이었다. 유독 낯을 가리고 모르는 사람과 있는 것을 못 견뎌 하던 어린 시절의 성격 덕에 유치원조차 다니지 않았던 나에게 친구를 하자며 끈질기게 쫓아왔던 징그러운 빨간 머리. 가끔 엄마를 따라 장을 보러 가는 시간을 어떻게 그리 귀신같이 알아채는지 문을 나서는 순간 옆집의 문이 열리고 타다닥, 네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었다.

 그렇게 며칠. 따라오는 것이 좀 덜할까 친구를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론 매일 같이 우리 집을 들락거렸었다. 하루는 장난감, 하루는 책, 하루는 게임기. 또래 아이들이라면 껌뻑 죽을 여러 가지 재밌는 것들을 들곤 내 앞에 늘어놓고 이것저것을 가르쳐주기도 했었다. 30평 남짓 되는 집 밖에 모르던 나에게 너는 점점 흥미로운 대상 그 자체가 되었고, 너로 인해 나의 세상이 점점 넓어졌었다. 그렇게, 여느 때처럼 호들갑을 떨다 넘어진 너를 보고 처음 웃었던 날.


'와, 가람아. 너 웃는 거 진짜 예뻐.'

'…뭐라는 거야.'

'나 크면 가람이랑 결혼 할래!'


 엉덩방아를 찧은 엉덩이를 문지르는 것조차 잊고는 부담스러울 만큼 얼굴을 가까이 하여 너는 내게 고백 아닌 고백을 했었다. 사회에서 통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결혼이라는 의미가 남녀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을 알게 되기 전 까지, 너는 줄기차게 나와 결혼을 약속했었다. 내 손을 붙잡고 엄마 앞으로 걸어가 꼭 나와 결혼하겠다며 큰소리를 쳤던 네가, 아주 오랜만에 떠올랐다. 너는 그 일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이젠 그것마저 아주 어린 시절의 추억거리에 지나지 않게 되었지만.

 너는 지독히도 착했다. 누가 너를 놀려대어도, 짓궂게 장난을 쳐대도 너는 늘 유연하게 그 상황을 무마했다. 아래로 어린 동생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타인을 배려하는 것에 대해선 도가 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냥했다. 여자애들은 너의 그런 점이 좋다며 수줍은 편지를 건네기도 했고 친구가 아닌 남자애들이 없었다. 꽤나 못된 아이들도 너의 상냥함에 네 앞에선 착한 아이가 되었지만 나는 네 그 성격이 싫었다. 네 둥근 성격은 나에게 쓸데없는 배려였다.


'얼레리 꼴레리~ 은찬이랑 가람이는 둘 다 남잔데 손잡고 다닌대요!'

'그게 뭐?'

'남자끼리 손 잡는 건 이상한 거야.'

'이상한 거 아냐!'


 내 기억엔, 아마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두어해쯤 지나 들었던 이야기였다. 밑으로 저학년들이 줄줄이 생기는 나이였지만 여전히 남자색, 여자색 따위를 나누고 남자는 로봇, 여자는 인형을 가지고 놀아야 한다는 틀에 서로를 끼워 맞출 나이 이기도 했다. 미약하게 성이라는 것에 눈을 떠가고 사귄다는 의미를 이해하며 여자친구를 만들어 손을 잡고 다니는 아이들이 종종 있기도 할 만큼 이제 막 이성을 알아가는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지금이야 같은 성별을 가진 이들이 사랑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고야 있지만 그 어린 시절엔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 마냥 놀려댔던 아이들이 있었다.


'미안해, 가람아.'

'뭐가?'

'나 때문에 그런 놀림 받아서'


 초등학교 2학년 때 까지였을까. 아직 나이가 두 손을 벗어나기도 전이었던 그 날 이후 너는 입버릇처럼 말하던 나와의 결혼이나, 손을 잡고 등하교 하는 일을 완전히 멈추었다. 그것을 당연하다 시피 생각했던 나에겐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으나, 빌어먹을 만큼 착함으로 똘똘 뭉친 너에겐 나름 큰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것 같았다. 자신이 했던 행동으로 친구가 놀림을 받았다는게 늘 착한 아이로 살았던 아이에겐 너무나도 큰 일이었던 것 같다. 그 후로도 너는 꽤나 친한 친구들이나 호감을 가지고 있는 대상에게도 절대 가볍게 스킨십을 하지 않았으니까. 사실, 그 때의 나에겐 늘 해왔던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놀라웠던 것이지 그 따끈한 손을 다신 잡을 수 없다는 것이 애타지는 않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덜컥 숨에 박힌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앞으로도 쭉 네 온기 따위를 그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턱을 괴고 있던 오른쪽 손목이 제법 아릿해졌다. 멍하니 비가 만드는 흔적을 바라보고 있다가 찬기가 흘러들자 정신이 들었다. 그래, 그랬었지. 한쪽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끔, 바라보았다. 곧 있으면 쉬는 시간의 종이 울릴 시간이었다. 그 뒤로도 지루한 자습시간은 남아있었지만. 다시금 밖을 내어다 보며 옛날의 너를 떠올리려다 문득 네게로 시선을 돌렸다. 꽤 오래 전부터 엎드려 자고 있는 너의 빨간 뒤통수를 시큰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에게 있어 그런 표정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을 절대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는 표정이나 다름없었다. 팔 저리겠다. 나는 조금만 턱을 괴고 있어도 저린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언제 그리 조용했냐는 듯 교실은 시끌벅적하게 소리로 가득찼고 너는 그 소리에 몸을 움찔이곤 몸을 틀어 나를 향해 돌아누웠다. 옅게 인상을 쓴 그 얼굴이 너무나 생소하다. 네가, 나에게 화낸 적이 있었나.


"주은찬"

"……."

"주, 은찬."

 

 가만히 너를 바라보던 내 벌어진 입술 틈새로 네 이름이 흘러나왔다. 시끌시끌한 아이들의 소리에 섞여 나조차도 제대로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나는 그 글자를 좀 더 천천히 발음하였다. 숨이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목 바로 아래까지 숨이 막히는 듯 한 그 기분은 너를 볼 때면 나를 늘 따라다녔다. 언제부터인지 모를 갑갑함. 가끔은 울고 싶을 만큼 먹먹한 기분이기도 했다. 나를 잡아주었던 작은 손의 열기가 그다지도 그리운 한기가 들 때면, 늘 그랬다. 다시금 네 이름을 불렀다. 아주 천천히, 숨이 막히지 않을 만큼 느리게. 목 끝까지 찼던 먹먹함이 눈 아래로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이마를 책상에 대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너를 바라보았다. 나는, 너의 이름 세글자만을 가져도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는데.


'넌 누구 사귈 마음 없냐?'

'하하, 그건 갑자기 왜?'

'너 좋다는 애는 하루를 멀다하고 늘어나는데 너는 관심 없어 보여서.'

'괜히 미안한 일 만드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쓸데없이 착한 새끼.

 남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너에게 고백한 아이들은 너와 멀어졌다. 모두 네가 천천히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날엔가 어설프게 너를 떠보았을 때도 징그럽게 너다운 대답을 해 와서 나는 그날 이후로 너에게 내 마음을 전하는 것을 포기했다. 분명 제 쪽에서 오해를 하게 만든 것이라며 미안하단 말을 할 것이 너무도 뻔해서, 나는 나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쓰림을 꾹, 꾹, 눌러 담기로 했다. 당장 싫은 티를 내지는 않겠지만 너는 변할 것이 분명했다.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서로의 집에 드나드는 빈도가 줄어들다, 너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자리마저 다른 이로 채워진다면 나는 너와 함께였던 모든 시간을 후회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쉬는 시간을 끝내는 종이 울렸다. 아이들은 여전히 웅성거렸지만 모두 자리에 앉아 있는 채였다. 점차 소리가 가라앉고,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담임이 반에 들어와 한 소리를 해댔다. 이내 아까와 같은 적막이 교실을 채우고, 빗소리만이 내 귓가를 울렸다. 그 적막 속에서, 이젠 부를 수도 없는 이름을 목 뒤로 삼키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목 뒤를 적시던 먹먹함이 속 아래로 끌어내려왔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울 것 같은 마음을 잠재웠다. 숨이, 조금 흔들렸다. 겨우 진정시킨 속을 달래며 눈을 떠 너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너는 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한바탕 소란 속에서 깨지도 않고 자는 너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감은 눈을 한참이나 마주치고 있다, 다시 눈을 감았다. 네가 그리도 깊게 꾸고 있는 꿈 속에서 함께있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하였다.

매일 타는 버스 안에서 오른쪽 끝자리에 앉아 woowoo

너의 일상을 나 혼자 몰래 훔쳐보곤 해

I can love u love u love u, and I need u need u

Will you be ma boy

 

 

 

 

 

*

 

 

 

 

 

 

 아, 탔다.

 

 소년의 입에서 탄성 같은 한숨이 흘렀다. 소년의 눈은 새빨간 머리를 하곤 교통카드를 찍고 있는 남자에게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는 준비성이 철저한 것인지 버스에 오르기 전부터 카드를 손에 쥐고 있다가 제 차례가 되면 버스기사에게 인사를 건네며 혹여나 남은 자리가 있을까 두리번댄다. 역시나 있을 리가 없는 자리에 작게 한숨을 내쉬곤 버스의 중간쯤, 손잡이를 잡고 이어폰을 낀다. 반복되는 나날 속 늘 같은 행동을 보여주는 남자였지만 소년은 그 짧은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손잡이를 잡은 남자가 커다란 메탈시계를 찬 손을 가볍게 흔들어 시간을 확인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야 소년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침이면 해가 쏟아지는 창가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소년이 늘 그 자리를 고수하는 이유는 항상 같은 쪽에 서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같은 라인에 서 있으면 자신이 그렇게 뚫어지게 주시하는 것이 보일까, 하여 마음 것 쳐다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눈이 시릴 만큼 햇볕이 내리쬐는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빼두었던 빨간 이어폰을 다시 끼웠다. 빨간 머리의 남자를 쫓고 나서 홀린 듯 샀던 빨간 이어폰은 새하얀 하복에 톡 튀는 색이었으나 소년은 늘 그 줄을 베베 꼬며 귓가에 흐르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I like it, I like it, I like it,

I like it, I like it,

I like, you.

 

 

 

 음역대가 높아 귀가 아프다는 핑계로 잘 듣지도 않던 여가수의 노래를 들은 것은, 이 시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우연히 걷던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가사는 시끌거리는 한 복판에서도 귓가에 박힐 듯 들려왔고 소년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몇 안 되는 가사를 외우려 애썼다. 노래가 끝나고야 급하게 휴대폰을 켜 가사를 검색하고 그것이 꼭 매일 아침을 기다리는 자신과 같다는 생각을 한 뒤로는 피곤한 등굣길, 소년은 20분이라는 시간을 꽉 채우도록 같은 노래를 들었다. 노래가 두어 번을 반복하고야 신호가 걸려 버스가 멈추었다. 멍하니 밖을 내다보던 소년은 고개를 기지개를 켜는 척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얀 셔츠에 까만색 바지. 같은 색의 서류가방과 마냥 불편해 보이는 구두. 딱 봐도 나 직장인이요,하는 남자의 뒷모습은 금요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지만 묘한 설렘을 느끼게 했다. 아침부터 누구랑 연락을 하는 것인지, 남자는 연신 싱글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자친구 있나. 아, 여자는 많은 것 같긴 하던데. 그저 휴대폰을 보며 키득거리는 남자를 보는 소년의 머릿속은 많은 갈래의 망상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다시 출발하는 차에 양 손으로 휴대폰을 만지던 남자가 휘청이었고 그것이 민망했던지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을 보고 소년은 애써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숨죽여 웃었다. 크흠, 하는 멋쩍은 기침을 해대며 모른 척을 하는 남자를 머릿속에 새기며 소년은 눈을 감았다.

 

 

 

'…아, 귀찮게.'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하는 버스를 처음 타게 되었던 날은 복장검사가 있던 날이었다. 운동을 하는 학생들이라 하더라도 봐주는 것이 없는 담당선생님 덕에 교문검사가 없을 시간을 계산해 나왔던 날, 소년은 남자를 처음 보게 되었다.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네는 살가운 모습과는 다르게 강렬한 붉은 색 머리. 그 묘한 어울림이 눈에 거슬릴 것 같던 순간, 유난히도 해가 좋아 빛이 쏟아지던 앞자리에선 붉은 머리가 반짝반짝 빛이 났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 번쩍거림에는 조금도 흥미가 없었다고 생각했었다. 답지 않게 일찍 일어난 하루였기 때문에 매우 피곤했고, 유일하게 남아있던 자리를 꿰찼더니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덕에 심통이 나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와 버스의 진동과 차분한 아침 라디오의 DJ의 목소리가 한데 섞인 복잡한 버스 안에서 소년은 눈을 감았고, 귓가로 불분명히 들리는 안내방송에 후다닥 일어나 정신없이 등교를 했다. 평소와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야 기억 속에 잔상처럼 남은 붉은 빛이 신경 쓰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그 뒤로 소년은 매일 30분을 일찍 일어나는 수고를 자처했다. 첫 날은 복장검사를 피하기 위해서, 둘째 날은 미묘하게 기억에 남은 이유를 알기 위해서, 셋째 날은 관심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넷째 날은…. 하루하루 이유를 대어가며 일찍 버스를 타던 소년은 어느 순간인가부터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야 말았다. 무엇을 듣는지 피식거리며 웃는 얼굴이나, 아침 댓바람부터 누구와 통화하는 건지 나직하게 대답해주는 목소리나, 빛이 반사되어 번쩍거리는 시계를 찬 손목이나, 깔끔하게 다려져 반쯤 접힌 셔츠 때문에 더욱 도드라지는 팔뚝 같은 것들을.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남자였으나 소년은 남자가 좋았다. 이유 없이 향하는 감정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매우 우스운 것이었으나 굳이 앞뒤를 따져가며 원인을 찾지 않아도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소년은 인정하기로 했다.

 

 

 

 

 

 

 

이번역은 농협사거리 입니다. 다음은 시민공원 앞입니다.

 

 

 

 소년은 노래가 멈춘 틈 새로 들리는 안내방송에 흐릿한 눈을 떠 부벼댔다. 농협사거리? 남자가 내리던 역이 어디였더라. 눈 안으로 파고드는 듯 한 빛 아래 잠이 들어 곧바로 돌아오지 않는 시야를 되찾기 위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남자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가 늘 잡고 있는 손잡이는 저와 같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쥐고 있었다. 벌써 내렸나, 하는 아쉬움에 늘어지게 하품을 해 대며 뻐근한 어깨를 크게 돌렸다. 그 순간 제 팔꿈치에 걸리는 둔탁한 느낌을 느끼며 소년은 옆자리에 앉은 이를 향해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

 

"청가람, 맞지?"

 

 

 

 제 팔꿈치에 어깨를 부딪친, 옆자리의 붉은 남자는 파란 명찰 위, 새햐앟게 새겨진 소년의 이름을 가리켰다.

 

 

 

"난 주은찬이야."

 

"…!…"

 

"매일, 나 보고 있었지?"

 

 

 

 가람은 그저 눈을 동그랗게 하곤 은찬을 바라보았다. 은찬의 말에 머릿속이 순식간에 엉켰다. 매일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남자가 제 곁자리에서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당황스러운데 그동안 은밀히 그를 쫓았던 사실을 그의 입으로 확인 받고 있었다. 잠이 덜 깨어 꿈인가 싶던 상황이 모두 이해되고 나서야 가람은 귀밑머리를 팔랑대며 얼굴을 붉혀 갔다. 너무 놀라면 비명소리도 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물론 극도의 공포로 놀란 것은 아닐 것이었으나 입을 벙긋대긴 커녕 차마 고개도 끄덕이지 못하는 가람을 보며 은찬은 씨익, 입꼬리를 당겨 웃고는 가람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붙여 속삭였다.

 

 

 

"나도 너 보고 있었는데."

 

 

 

 남자가 고갤 돌릴 때면 가끔 보이던 왼쪽 입가의 점이 입꼬리를 따라 호선을 그렸다. 오로지, 그것만 보였다.

 

둥굴레차!/은찬가람 | Posted by 윤새벽 2015. 3. 20. 22:01

[은찬가람/찬가람] In the Library

 가람은 파란색 니트를 꿰어 입었다. 팔을 하나씩 끼워 넣고 머리를 빼내는 동작은 잠에서 덜 깬 아이마냥 느릿했다. 머리와 니트자락이 닿는 순간은 아주 짧았지만 정전기가 올라 귀 사이로 빠져나온 애교머리는 볼에 달라붙었고 머리칼은 잔뜩 일어나 부스스해졌다. 그러나 가람은 그것에 신경을 겨를이 조금도 없는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나 멍한 채 있었을까, 가람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는지 니트 밖으로 반쯤 삐져나온 손으로 천천히 머리를 정리했다. 눈 둘에 코 하나, 입 하나. 보기 흉한 상처는 없고, 특이한 것이라면 빨간 눈? 얼굴이 좀 얄상하단 소리는 들어봤지만 딱히 남자에게 잘 먹힐만한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가람은 거울에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다 머리를 정리하던 손을 내렸다.

 

 

 

"정말 날 좋아하는 게 맞아?"

 

 

 

 가람은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가람은 까만색 크로스백을 매곤 현관을 나섰다. 복잡한 가람의 마음과는 다르게 하늘은 맑고 맑았으며 꽃샘추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완연한 봄의 날씨가 가람을 맞았다. 겨울 내내 엉성했던 가지는 어느새 온통 연둣빛이었다. 벌써 싹이 나나? 그럼 곧 벚꽃도 피겠네. 아직은 여유로운 출근길에 가람은 느린 걸음을 더 늦추며 가로수들을 구경했다. 도서관 앞이 다 벚나무라고 했었지…. 다 피면 예쁘겠다. 그거 쓸어내려면 좀 귀찮겠지만. 만개할 벚나무를 상상하며 내내 하던 고민도 잊은 채 가람은 걸음을 옮겼다. 꽃을, 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봄이란 건, 특히 봄의 벚꽃이란 건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들뜨게 하는 재주가 있었으므로 가람은 드문드문 연분홍빛이 보이는 벚나무를 눈에 담으며 걸었다. 괜히 마음이 들떠 콧노래를 흥얼거리려는데 제법 차갑지만 밉지만은 않은 바람이 가람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고 지나갔다. 가람은 머리를 헤집는 바람에 크로스백의 끈을 꽉 쥐었다. 괜한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와, 이걸 기억하고 있었어요? 아무리 졸업한지 얼마 안됐다고는 하지만 이런 거 보통 여기서 다시 외우거든요. 나도 그랬고'

 

'…면접 보면서 혹시 물어볼까봐 다시 공부 했었어요.'

 

'그래요? 그래도 대단하다, 가람씨'

 

 

 

 방금 제 머리를 스친 바람결처럼, 칭찬이랍시고 제 구실 다 하게 자란 성인남자의 머리를 살살 잘도 쓰다듬는 그 남자는, 생각해보면 그런 말도 안 되는 고백을 하기 전부터 제법 티를 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나던 그 날부터 차근차근 짚어보아도 남자는 매사에 다정했었다. 가늘고 길게, 있는 듯 없는 듯. 최대한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고 살고 싶어 뻣뻣하게 대하기만 했던 첫 만남에도 남자는 붉은 머리 뒤로 손을 얹어 하하, 웃으며 가람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나는 주은찬이에요. 여기서 일한지는 3년 정도? 내가 선배니 편하게 가람씨라고 부를게요.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여도 남자는 제가 할 말까지 다 해대며 가람의 곁에 붙어있었다. 책을 정리하고 있으면 자연스레 어깨에 올라와 있는 손이라던가, 눈이 마주치면 피하기 바쁜 저와 다르게 여유롭게 웃어주며 건네는 말이라거나, 나직하고 부드러운 게 딱 듣기 좋게 영화 좋아해요?하고 물어오는 목소리라거나. 척 보기에도 여자 여럿 울렸을 것 같이 다정함이 몸에 베인 은찬은 가람에게 같은 남자라도 괜히 속 안이 간질거리게 하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필요이상으로 다정할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늘 들게 하는. 또 칭찬엔 어찌나 관대하신지, 조금 일찍 도착해 창문을 열어두는 것만으로도 머리를 쓸어주며 부지런하다느니, 덕분에 아침이 참 상쾌하다느니 등의 말을 줄줄 꺼내놓는 사람. 그가 바로 은찬이었다.

 

 가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근데 그렇게 칭찬을 해줄 때 머리에 닿는 그의 손은 좀 따뜻했던가. 가람은 괜히 뜨끈해지는 정수리를 애써 무시하곤 꿋꿋이 걸어 나갔다.

 

 

 

"아, 선생님 얼굴 어떻게 보지…."

 

 

 

 그제야 다시 스물스물 밀려오는 고민에 가람은 입술 끝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저번 주, 그러니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금요일이었던 그 날은 확장공사를 마치고 재개관을 하는 고운시립도서관의 마지막 리모델링 기간이었다. 3월 2일자로 시립도서관의 사서로 발령이 난 가람은 첫 출근부터 수백 권의 책을 정리하고 목록하며 분류하는 일을 맡아야 했으나 쉴 새 없이 일해도 끝이 나지 않은 책 정리에 결국 마지막 날-금요일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까지 야근을 해야만 했다.

 

 

 

'가람씨는 집이 어디에요? 멀다고 했었나?'

 

'아뇨, 한 20분 걸으면 돼요. 남들은 한 10분에서 15분 정도 걸린다는데 제가 걸음이 좀 느려서'

 

'그렇구나. 개관일 맞추려면 오늘 제때 퇴근 못할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죠, 뭐'

 

'음, 이왕 늦게 끝나는 거 같이 저녁 먹고 들어가요. 데려다 줄게요.'

 

 

 

 그때 고개를 끄덕인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고, 가람은 생각했다. 저녁이야 그렇다 쳐도 쌀쌀한 봄 밤, 20분 걸어가는 것이 귀찮아 차를 얻어 탄 덕에 가람은 주말을 내내 멍한 기분으로 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겨우 책 정리를 끝내고 지친 몸을 근처의 삼겹살집의 고기로 위로를 한 가람은 제법 신이 난 기분으로 은찬의 차에 올랐었다. 지긋지긋하던 책 정리는 당분간 안녕인 것도 좋았고, 주말이 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쉴 수 있게 된 것도 좋았으며, 냄새가 배는 것 하며 귀찮은 것 하며 집에선 잘 먹지도 않는 고기를 먹은 것도 좋아 가람은 방방 뜬 기분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응, 잘 들어가요.'

 

 

 

 쌀쌀한 날씨에 손을 불어가며 퇴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즐겁던 가람은 평소보다 조금 더 들뜬 기분으로 은찬에게 인사를 건네곤 차에서 내리려 했다. 내리려고 했었다. 안전벨트만 잘 풀렸다면. 그러나 어째서인지 벨트는 아무리 눌러도 풀리지 않았고, 나름 인상까지 써 가며 벨트를 풀어보려 했지만 옷이 끼인 것인지 버튼은 조금도 눌리지 않았다. 기어이 벨트가 잘 안풀려요? 하고 몸을 튼 은찬이 벨트를 푸는 것을 도와주었고 정말 우습게도, 안전벨트는 은찬의 손이 닿자마자 스르륵 하고 풀려 버렸다. 허탈한 심정으로 한 번에 풀려버린 버튼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을 때, 가람은 자신이 너무 무방비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나치게 친절한 은찬은 안전벨트를 제 자리에 돌려주기까지 했고, 그 덕에 가람은 조수석의 가장 끝에 있는 벨트를 올리기 위해 가까워진 은찬의 얼굴, 자신의 목 뒤쪽 언저리에 닿은 손, 숨만 쉬어도 숨결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를 하나하나 느끼며 숨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갑자기 숨이 확 쉬어지면 어떡해. 가람은 그저 앞만을 바라보며 얼굴이 벌게지도록 숨을 참았다.

 

 

 

'왜, 왜 이렇게 친절해요…!'

 

 

 

그렇게 안전벨트가 제 자리를 찾고야 자리로 돌아간 은찬을 보고야 순식간에 긴장이 풀린 가람은 몇 번을 생각해도 얼토당토않은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제 머를 죄다 쥐 뜯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말도 안 되는 질문에 그는 뭐라고 대답했던가.

 

 

 

'좋아하니까요'

 

'…네, 네? 네?!'

 

'내가 가람씨 좋아한다구요. 사실 쭉 지켜봐 왔어요. 꽤 오래.'

 

 

 

 가람은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끼며 제 앞에 펼쳐진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니까, 늦게까지 일을 하고 저녁을 먹고 차로 데려다 주는 상황…부터가 이상했구나. 단 둘이 있는 차안은 언제 어떤 묘한 일이 일어난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공간이었다. 심지어 그 상황에 고백할 빌미를 준 것은 가람 자신이었다. 물론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자신의 상사는 제 얼토당토 하지도 않은 말을 놓치지 않고 좋아해 왔다고 고백했다. 가람은 저절로 마른 침이 삼켜졌다. 놀라 고개를 돌린 시선 앞엔 늘 기분 좋게 웃고 있는 눈이 있었다. 솔직히, 그 눈웃음에 늘 약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늘 같은 표정으로 바라봐 주며 가람씨,하고 부를 때면 목 언저리가 간질간질 했다. 괜히 두근대는 것 같은 기분을 억지로 눌러낸 적도 있었다. 아니라고, 아닐 거라고 애써 부정해 왔던 감정들은 은찬의 고백으로 봇물이 터지듯 흘러나왔다. 그래. 사실은 나도….

 

 

 

'아…, 그, 저도, …해요.'

 

'네?'

 

'저, 저도 좋아한다구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그때까지 연락하지 마세요!'

 

'가람씨!'

 

'워, 월요일에 봬요'

 

 

 

 빼-액, 말을 내 뱉은 가람은 후다닥 차에서 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뛰어 들어갔었다. 늘 올라가는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을 단숨에 올라 쿵쿵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가람은 문에 등을 기대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 앞에서 딸꾹질을 하지 않은 것이 대견할 정도로 놀란 가람은 벌떡벌떡 뛰어대는 가슴이 가라앉을 때 까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목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내쉬며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미쳤어, 청가람….'

 

 

 

 겨우 진정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섰을 땐 거울에 비친, 여전히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만이 가람을 맞아주었다. 그 빨개진 얼굴을 마주한 순간부터야 가람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보통 고백이 다 이런가? 가람은 제대로 된 대화도 아니었던 것 같은 차 안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너무 놀라 갑자기 내뱉은 말에 진지한 고백. 하지만 그 고백에도 어수선한 말만 잔뜩 내 뱉은 나…. 그럴 리가 없지. 아, 망했어, 진짜. 좀 더 진지하고 차분하게 말할 걸. 목소리까지 덜덜 떨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최악이다. 그렇게 가람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향해 발길질을 해대며 그 밤을 꼴딱 새웠었다.

 

 

 

'좋아하니까요'

 

 

 

 가람은 좋아한다 말했던 은찬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선 한숨을 내쉬었다. 은찬과 함께 일하게 된지 겨우 6주가 되는 날이었다. 생각해보면 겨우 6주라는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동안 둘은 꽤나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은찬은 늘 다정했고, 가끔 잘 들어갔냐는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주말엔 함께 영화를 보러가기도 하고 은찬의 차로 한강대로변을 달리며 기분전환을 하기도 했었다. 아, 데이트였네. 가람은 이제야 깨닫게 된 은찬과의 만남들을 곱씹으며 지지리도 눈치가 없던 자신을 탓했다. 가끔 받는 연락은 즐거웠다. 몇 글자로 하루의 피곤이 싹 씻겨 내려갈 수도 있다는 것을 은찬과의 메시지에서 알 수 있었고 먼저 연락이라도 하는 날엔 -답장이 안올리는 없었지만- 답장을 기다리며 하루 종일 휴대폰을 붙잡고 있기도 했다. 그와 함께 보는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멜로영화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고 함께 달렸던 한강대로변은 뭣도 없는 겨울의 거리에 가까웠지만 특별했다.

 

 

 

"와, 나 좀 심하긴 했구나."

 

 

 

 가람은 가방의 끈을 단단히 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좋았음에도 어쩜 그렇게 둔했는지. 게다가 고백 받을 땐 최악이었고. 스스로 머리를 콩,하고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게 봐주었을 사람이니 가람은 이제부터라도 만회 하고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일단 대답부터 제대로 다시 할 생각이었다. 저도 선생님이 많이 좋아요. 우리 사귈래요? 가람은 주말 내내 연습했던 말을 다시 되뇌었다. 이번엔 정말 잘해야 해. 내내 고민하고 연습한 말이니까. 가람은 마른 침을 삼키며 언제쯤 저 말을 꺼내야 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 답을 할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은, 우습게도 어떤 예능프로그램 덕분이었다. 갑작스런 고백에 어설프게 답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려 그것을 어떻게 만회해야 하나에 대해 생각 하느라 집은 온통 조용했다. 역시 내 태도가 조금 애매했을까. 사귀자고 하는 게 나을까? 깊게 고민을 하다 보니 문득 적막해진 집이 머쓱해 가람은 텔레비전을 틀어 시끌시끌한 예능프로그램을 틀어두었었다. 틀어놓은 예능프로그램에선 말을 잘하기로 소문난 여자 게스트가 나와 재잘댔고, 그녀는 깊게 파인 브이넥티 사이로 보이는 가슴을 출렁이며 꽤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그 사람과 키스하는 상상을 했을 때 좋으면 사귀어요'

 

 

 

 꽤 오랜 시간 깔깔거리면서 흘러나온 이야기들은 모두 귓가로 스쳐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은 어찌나 귀에 내다 꽂는 것 같던지. 가람은 홀린 듯 텔레비전을 주시했다. 키스? 키스하는 상상이라….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을 하며 가람은 머리를 굴려 은찬을 상상했다. 붉은 머리칼과 저를 볼 때면 늘 반쯤 접혀 있는 눈, 늘 웃고 있는 입과 그 곁의 작고 까만 점. 이거, 악역들만 있는 그거 아니에요?라고 물었던 적이 있는 그 점은 늘 입술에 먼저 시선이 가게 만드는 묘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 이렇게만 생각해도 꽤나 간질거렸다. 키스하는 상상까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흠, 흠. 가람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유독 눈에 들어오던 입술을 주시하며 상상 속의 은찬에게 다가갔다. 한걸음, 한걸음.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슴이 또 둥, 둥 울려대었다. 은찬의 앞에 멈추어 서서는 여전히 웃고 있는 은찬의 두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개를 살짝 틀고, 눈을 감는 그 순간, 상상 속의 은찬은 또 좋아해요,하고 말을 했다.

 

 

 

'내가 가람씨 좋아한다구요. 사실 쭉 지켜봐 왔어요. 꽤 오래.'

 

 

 

 그렇게 가람의 입술과 은찬의 입술이 닿는 순간, 가람은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가볍게 두근거리던 심장은 어느새 쥐어짜내기라도 하듯 아프게 내리 앉았다. 그것은, 좋은 느낌이라고 하기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했으나 가람은 알 수 있었다. 좋다 못해 아프도록 설레는 기분이었다. 숨은 턱턱 막히고 몸은 뻐근하고 속은 갑갑했다. 그래도 좋았다. 그것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고 심장이 두근거려 어찌할 줄을 모르는 감정이었다. 놓쳐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가람은 생각했다. 역시, 다시 제대로 고백해야 해. 그렇게 제 감정을 정의하고 나서는 주말 내내 머리를 싸매며 고민해야 했다.

 

 

 

"아…, 다 왔다"

 

 

 

 가람은 자동문 앞에 멀찍이 서서 문을 올려다보았다. 가람이 일찍 출근하는 편이었으니 은찬은 안에 없겠지만 들어가면 정말 무엇인가를 시작이 될 것만 같은 설렘에 속이 울렁였다. 어떻게 운을 띄워야 하지. 아니 그 전에,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해도 되는 걸까. 가람은 제 대답에 늘 웃는 은찬의 표정이 떠올랐다. 또 잔뜩 부끄러워져서 엉뚱한 말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람은 마른 침을 삼키곤 문 안으로 들어섰다. 사원증을 들곤 경비를 해제하려는데 평소와 달리 노란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가람은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어…? 금요일 날 분명히 둘이 문단속을 하고 갔는데 빨간불이 아니라 노란불이 들어온다는 건…. 가람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먼저 와 있는 거겠지. 눈을 꽉 감고 문에 머리를 콩, 박았다. 정신 차리자 청가람. 너는,

 

 

 

"아, 가람씨 왔어요? 바빠요. 얼른 이것 좀 도와줄래요?"

 

 

 

 도와줘야 할 사람이니까…. 가람은 고개를 끄덕이다 눈을 번쩍 떴다. 어, 이게 아닌데? 가람의 눈앞엔 잡다한 것들이 잔뜩 들어있는 상자를 옮기는 은찬이 보였다. 은찬은 그런 가람에게 눈길을 줄 시간도 없는지 바삐 걸음을 옮기며 창고로 향했다. 갑작스런 습격에 어안이 벙벙해진 가람은 일단 안으로 들어서 가방을 내려놓았다. 창문이 활짝 열려있음은 물론이고 평소보다 더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는 사무실을 바라보며 가람은 휴대폰을 꺼내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8시 33분. 늘 도착하는 시간보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은찬이 저렇게 급해하며 몸을 움직일 정도는 아닌 시간이었다. 평소라면 오지도 않았지.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는 상황이었으나 가람은 30분전, 그러니까 가람이 집에서 나갈 즈음 은찬에게서 메시지가 온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가람씨! 오늘 재개관한다고 시장님께서 오신 다네요. 여기저기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일찍 와줄 수 있죠? 갑자기 마안해요. 나도 막 연락받은 거라.]

 

 

 

 아…. 가람은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되었지만 저 멀리 빠진 넋을 다시 몸으로 데려오는 데에는 조금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한 듯 싶었다. 창고에 잡동사니를 쌓아둔 은찬이 여전히 멍한 가람을 보곤 눈앞에서 그의 손을 흔들어댔다.

 

 

 

"우리 지금 급하다니까요? 얼른 여기 치우고 회의실이랑 관장실도 치워야 해요. 얼른!"

 

 

 

그의 말에야 비로소 가람은 얼떨떨한 고개를 끄덕이며 청소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

 

 

 

 

 

"아, 죽겠다."

 

 

 

 그리고 하루는 정말 진절머리가 나도록 바빴다. 도서관과 관련된 높은 사람들은 쉴 새 없이 방문하여 이런저런 덕담을 늘어놓고 갔고, 평일, 그것도 월요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디서 그렇게 사람들이 쏟아지는 것인지 책을 빌려주는 것만으로도 종일 엉덩일 의자에 붙일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학교를 마치고 온 초등학생 아이들마저 은찬에게로 졸졸 쫓아와 선생님이 보고싶었다느니, 이제 또 책을 읽어주실거냐느니 재잘재잘 떠들다 사라졌다. 가람이 은찬을 본 것은 그 시간 잠깐 뿐이었다.

 

 그렇게 6시, 도서 열람실의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서야 가람은 하루 종일 시달린 몸을 의자에 앉힐 수 있었다. 아니, 이전엔 어떻게 혼자 다 했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람은 진이 쏙 빠져있었다. 재개관을 두 번 했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가람은 도서를 대여/반납해주는 데스크에 털썩 엎드렸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순식간에 노곤해지는 몸에 그저 가만가만 숨을 내쉬던 가람은 제 곁으로 가까워져 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는 귀가 오똑 섰다. 이 시간, 이쪽으로 오는 사람은 은찬 밖에 없을 테니까. 그 이름을 떠올림과 동시에 가람은 바쁜 하루에 치여 미뤄두고 있었던 고민들이 목 끝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 어떡하지, 어떡하지. 같은 생각만 줄기차게 머릿속을 맴도는데 어느새 곁에 바짝 다가온 은찬은 가람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가람을 불렀다.

 

 

 

"가람씨"

 

"……."

 

"자요?"

 

"…아니요."

 

"많이 피곤하죠?"

 

 

 

 그에 가람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머리에 올라온 따뜻한 손이 가람의 머리를 살살 쓸어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곤했는데, 방금 전까진 피곤했는데. 가람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대며 가만히 은찬의 손길을 받아내었다. 머리 위에 올라온 손은 늘 이정도의 온도였다. 미지근하지도, 차지도 않은 딱 따뜻한 온도. 그러니까, 잔뜩 피곤한 몸을 담구었을 때 딱 몸이 풀어질 만한, 그런 물의 온도. 어느새 녹진하게 풀어지는 몸에 가람은 두 팔을 베고 있던 고개를 들어 은찬을 바라보았다. 여전한 미소였다. 늘 자신에게만 지어주었으면 하는 그 미소. 은찬은 데스크의 끝에 살짝 앉아선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는 가람과 눈을 맞추어주고 있었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은찬의 입이 벌어지려는 순간, 가람은 은찬의 말을 막아섰다.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해가 길어져 어둑해 지려는 찰나 단 둘 뿐인 도서관. 선생님,하고 막아선 가람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그런 가람의 말에도 다정하게 왜 그러냐 묻는 은찬 덕에 가람은 마른 침을 삼켰다.

 

 

 

"저…, 금요일날, 차…에서 말인데요"

 

"아, 네. 왜요?"

 

"제가 너무 횡설수설한 것 같아서…."

 

"응, 그래서요?"

 

"그래서 제가 생각을…, 아니 대답을, 저, 그러니까…."

 

 

 

 가람은 다시 한 번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겨우 다시 얻은 기회인데. 머릿속은 엉망진창으로 엉켜 연습했던 말은커녕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은찬의 눈은 여전히 다정하게 가람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머리 위에 올라와 있던 손은 어느새 내려가 기대고 있는 은찬을 받치고 있었다. 따뜻했던 은찬의 손이 사라지고 머리가 점차 식어갔으나 입을 땐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가람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멍한 머리로 그러니까,라는 단어만 반복하며 마른 침을 꼴딱꼴딱 삼키던 가람은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우리 사귀는 거 맞죠!"

 

 

 

 아…, 망했어. 결국 자신이 연습하던 말과는 아주 거리가 먼 말을 내 뱉은 가람은 절망했다. 그렇게 연습했는데. 어느새 꽉 쥐고 있던 주먹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다. 가람의 머릿속엔 만회는커녕 웃지나 않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꽉 감았던 눈을 조금씩 뜨며 가람은 은찬의 얼굴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겨우 웃음을 참고 있던 은찬은 가람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연락도 하지 말라더니. 주말 내내 고민한 게 그거였어요?"

 

 

 

 가람은 대꾸할 수 없었다. 그저 쥐구멍이라도 없는지 눈을 굴리기에 바쁠 뿐이었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라 차마 은찬과 눈을 마주칠 수도 없었다. 이럴 거면 주말 내내 고민한 보람이 없잖아! 속으로 외쳐보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나직하게 웃는 은찬의 웃음소리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은찬이 가람을 불러왔다.

 

 

 

"가람씨, 나 좀 봐요"

 

"왜, 왜요…."

 

"이거면, 답이 됐어요?"

 

 

 

 말과 동시에 은찬이 가람의 손을 잡아 왔다. 머리에, 어깨에만 닿았던 따뜻한 온기는 가람의 손 안에 온전히 모여들고 있었다. 빤히 손을 바라보는 가람에 은찬은 손을 꽉 쥐었다가 가람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맞추어 깍지를 꼈다. 처음부터 은찬을 위해 만들어진 양, 가람의 손은 은찬의 손에 딱 맞춘 듯 잡혀 들어갔다. 잡아준 손에서 전해지는 온도가 가람에게 스몄다. 스민 온도는 천천히 몸을 달궈 심장소리를 키워 나갔다. 심장소리를 타고 온 몸으로 전해지는 설렘이 가람의 몸을 모두 돌고 다시 은찬에게로 전해졌다.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간, 도서관에서. 가람은 새빨개진 얼굴로 은찬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것을 보며 은찬은 그저 웃었다. 꽉 잡은 두 손을 바라보는 가람의 눈이, 수줍게 달아오른 양 뺨이, 꽉 마주한 그 손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럽다고 은찬은 생각했다.

 

 

 

 

 

 

 

 

 

 

-

 

 

그렇게 이야기는 해피엔딩.

 

 일 줄 알았건만. 가람은 머지않아 새로운 고민에 봉착했다. 하늘색 가는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고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나가던 가람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고민했다. 목 부근의 마지막 단추를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남들이 보면 우습게 여길 고민일지도 몰랐으나 가람에겐 그 무엇보다도 심각한 고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겨우 두 달이 되어 가는 애인은 스킨십이 진해도 너무 진했다. 그래, 사귀기 전부터 그렇게 어깨에 손을 올리고 머리를 쓰다듬더니. 가람은 마치 제 앞에 은찬이라도 있는 듯이 거울을 노려보았다. 그저 다정한 사람인 줄만 알았던 제 애인은 그다지도 능글거리는 남자였고 이제 여름이 다가와 옷이 얇아지고, 짧아질수록 몸과 몸이 닿는 횟수는 늘어만 갔다. 처음 반소매를 입고 간 며칠 전만 해도, 은찬은 유난히 곁에서 어물대기를 반복하더니 기어코 열심히 책을 정리하고 있는 가람의 곁으로 바짝 붙어선 책장으로 뻗은 손목을 부여잡고 팔뚝에 입맞추었었다. 두어 사람들이 도서열람실을 둘러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입을 대어 오는 대담한 행동에 가람은 소리를 지를 뻔 했으나 그것을 어떻게 알아챘는지 손 전체로 가람의 입을 막고는 그 위에 검지손가락을 세워 올렸다.

 

 

 

'쉿. 도서관에서 떠들면 혼나요.'

 

 

 

 그리곤, 웃었다. 웃지 라도 않았으면 정강이라도 걷어차 주었을 텐데. 웃기는 또 어찌나 가슴이 떨리게 웃던지, 입에 일자로 딱 붙은 검지는 그저 평범한 손가락과 다를 게 없었는데도 괜히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얄미운데도 좋아서, 가람은 그저 은찬을 노려만 보다 품 안에 있던 책들을 마저 정리했다. 그것뿐이었으면 가람은 거울 앞에서 이런 고민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평소보다 목이 조금 더 드러난 옷을 입고 간 날은 사무실 안에서 목에 뽀뽀도 당했었다. 둘이 있는 틈이 나면 손을 잡아오고 가끔은 껴안기도 했다. 가람이 말을 할 거리를 던져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을까 싶을만큼 은찬은 가람과 닿는 것을 좋아했다.

 

 

 

"…잠궈야겠다."

 

 

 얼마 전 은찬이 목에 입을 맞추었던 것까지 떠올리니 목 언저리가 화끈거려 가람은 마지막 단추를 굳게 잠그곤 집을 나섰다. 장소가 어디든 손부터 뻗어오는 은찬이 보통인 것인지 아닌 것인지 도통 분간이 가지 않았다. 모두가 그렇게 하는데 가람 혼자 그렇지 못한 것이라면 노력해야 할 일이겠지만, 가람의 눈엔 은찬이 유독 특별나 보였다. 서슴없이 스킨십을 하는 것도 신기했지만 남들의 눈을 신경쓰지 않는 다는 점도 한 몫을 했다. 아니, 어떻게 사람들 있는데서 그럴 생각을 해? 가람은 걷는 내내 진지한 얼굴로 고민을 해 봤지만 이유라고 꼽을 것 같으면 은찬이 어떤 스킨십을 해 와도 당황하여 그대로 넘어가준 것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래, 그게 문제였어. 가람은 얕게 인상을 쓰며 오늘부터는 절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주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가람씨."

 

"네, 그러네요."

 

 

 

 가람은 은찬에게 인사를 건네곤 그가 곁으로 와 앉으려는 순간 보란 듯이 일어나 반납된 책이 꽂혀있는 북트럭을 끌었다. 둘이 가까워진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노골적으로 그의 손길을 막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가람의 행동에 은찬은 그를 바라보았지만 가람은 얼굴조차 마주해 주지 않고 열람실로 자리를 옮겼다. 멍하니 자리에 남은 은찬은 가람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눈을 두어번 깜빡이곤 허탈하게 웃었다.

 

 그 후로도 가람의 '은찬 피하기'는 계속 되었다. 은찬이 근처에만 와도 뽈뽈뽈 사라지는 가람은 은찬의 눈에 마냥 귀여웠지만, 정작 피해 다니는 가람은 은찬이 어디에 있는지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죽을 맛이었다. 자신이 도망 다니는 것을 즐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은찬은 가람이 한발자국 멀어지면 두발자국 다가와 얼쩡대었다. 왠지 자신이 골탕을 먹는 것 같은 기분에 은찬을 몰래몰래 노려보았지만 그것도 잠시, 널널한 오전 시간이 지나니 책은 쌓여갔고 도서관에서 하고 있는 독서프로그램을 준비하려니 굳이 은찬을 피하지 않아도 바빠 마주할 시간도 없게 되었다.

 

 

 

"아, 몇 권 안 남았다."

 

 

 

 퇴근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산더미처럼 쌓였던 반납 책들도 몇 권 남지 않았다. 절반을 나누어 은찬과 열심히 책을 정리해서인지 퇴근 시간 전엔 한 숨을 돌릴 시간도 남을 것 같았다. 남은 책을 한권, 한권 꽂아나가다 높이가 맞지 않는 책들의 틈 새로, 가람은 붉은 머리칼을 보았다. 책의 자리를 찾기 어려운 것인지 허리까지 반쯤 굽혀 책의 번호와 책장에 꽂힌 책들을 번갈아 보는 은찬의 모습은 왜인지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에서 은찬을 본 것이 참 오랜만이라고, 가람은 생각했다. 책 틈새로 보이는 은찬은 그 얼굴이 온전히 보일 듯 보이지 않아 애가 탔다. 금방이라도 그 얼굴이 저를 보고 웃어줄 것만 같았지만 여전히 책에 몰두하고 있는 표정은 먼저 다가가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람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가람은 품에 안고 있던 책 한권을 제 자리에 끼워 넣고 본격적으로 은찬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마음 것 볼 수 있었으나 한 책장을 건너 숨을 죽이며 몰래 바라보는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기분이었다.

 

 빨간 머리칼과 진지한 눈, 잘 빠져나간 코, 늘 입에 먼저 시선이 가게 하는 보일듯 보이지 않는 점 그리고 그 아래를 매끈하게 지나가는 턱 선에, 목 아래로 널널해지는 옷 틈까지. 가람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고 그 순간 그 작은 책 틈 사이로 은찬과 눈이 마주쳤다.

 

 

 

앗!

 

하는 새에 몸을 틀어 책장을 등진 가람은 정말 물건을 훔쳐보다 걸린 아이처럼 두근대는 가슴을 멈출 수가 없었다. 품에 있는 책을 꽉 끌어안으며 은찬이 곁으로 올까 숨마저 멈추었다.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 퇴근 시간은 물론 퇴근 후에, 주말에, 늘 보던 얼굴인데도 이상할 만큼 쿵쾅대는 가슴에 가람은 그저 눈을 꽉 감고 고개를 흔들어댈 뿐이었다.

 

 

 

"뭐에요? 하루 종일 피하더니 그렇게 몰래 쳐다보기나 하고."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건만 바로 제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가람은 놀라 숨을 집어먹었다. 그와 동시에 놀라 커진 눈에는 책장에 한 손을 올린 채로 가람에게 몸을 기울인 은찬이 오롯이 비추었다. 뚫어질듯 가람을 내려다보는 은찬에 가람은 품 안의 책을 바짝 안으며 눈을 피했으나 그 공간만큼 밀착해 오는 은찬에 은찬을 올려다보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하, 하하, 제가 그랬던 가요."

 

"응. 그랬어요. 그래서 종일 보고 싶었는데"

 

 

 

 문을 닫을 시간이 가까워진 조용한 도서관, 소리가 울릴까 나직히 말을 뱉어내는 은찬은 잔뜩 얼어붙은 가람이 마냥 귀여운 것인지 짓궂은 표정을 하곤 가람의 귓가에 속삭여댔다. 귓가에 숨이 불어넣어질 때마다 가람은 움찔댔다. 지나치게 간질거리는 은찬의 목소리가 너무도 가까이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너무 잘나서, 굳이 그렇게 집어내지 않아도 너무 놀라서 콩닥거리는 가슴은 은찬이 한마디를 꺼낼수록 더 거세게 뛰어댔다.

 

 

 

"그…, 저, 너무 가까, 운, 데…."

 

"그래서요?"

 

 

 

 말을 꺼낼수록 더 몸을 붙여오는 은찬에 가람은 눈앞이 아찔했다. 여기서 이렇게 붙어서 뭘 어쩌겠다고! 된다면 소리라도 치고 싶을 만큼 가까워서 가람은 애써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온 몸을 울리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은찬에게 전해질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아니, 이미 들렸을 것이란 생각에 가람은 당장이라도 은찬을 밀쳐내고 은찬에게서 떨어지고 싶었다. 목언저리는 물론 얼굴까지 열이 올라 홧홧한데 애써 무시하고 있는 시선은 다른 곳을 보고 있어도 가람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조금만 비켜 주시면…."

 

 

 

 은찬을 밀어내며 그제 서야 은찬과 눈을 마주친 가람은 밀어내던 손마저 멈춘 채로 멍하니 은찬을 바라보았다. 반쯤 내리깔고 가람을 바라보는 은찬의 눈은 온전히 가람에 대한 애정으로 잔뜩 젖어 있었다. 지겹도록 보는 얼굴에, 늘 보는 웃음이었지만 가람은 또 마음 한 구석이 간질거려오기 시작했다. 자신을 보고 나른하게 웃는 그 얼굴이 그렇게 안심이 되면서도 그 눈이 지독히도 좋아 울컥, 괜히 울음이 날 것만 같았다. 늘, 이상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니까. 가람은 은찬과 눈을 맞추곤 모른 척 은찬의 장단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점점 가까워져오는 은찬에 가람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자, 잠깐만요!"

 

 

 

 정말로, 살포시 눈을 감고 넘어가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눈을 감으려는 순간 보이는 CCTV는 은찬과 가람을 너무 적나라한 각도에서 찍어대고 있었다. 가람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처음부터 너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듯한 까만 카메라는 사랑에 폭 빠져있던 가람의 신경을 긁어대었다. 도서관 대부분의 업무를 맡고 있는 은찬과 가람이었으나 CCTV는 둘의 권한 밖에 있는 보안 시스템이었다. 지금 좋다고 평생직장에서 쫓겨날 수는 없지. 결국 가람은 슬며시 은찬의 목에 감으려 했던 손을 풀곤 은찬의 어깨를 밀어냈다.

 

 

 

"저기, 카메라 있잖아요."

 

 

 

 혹시나 누구에게 들릴까 입을 벙긋거리며 말대꾸를 한 가람이었으나 돌아오는 은찬의 대답에 결국 두손두발을 다 들고 은찬의 두 목을 끌어안았다. 애초부터, 잘난 애인의 진한 스킨십은 고민거리가 되지도 않는 것이라는 생각 또한 들었다.

 

 

 

"네 달을 일했는데 아직도 몰라요? 사실 저거 안 켜져 있어요."

 

 

 

좋으면 그만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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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16.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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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굴레차!/은찬가람 | Posted by 윤새벽 2015. 2. 3. 21:58

[은찬가람/찬가람] Fetish

 현우도 수련을 하러 나간 시간, 가람은 바닥에 배를 깔고 컴퓨터 앞에 누워 타닥타닥 자판을 눌러댔다. 아무도 없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 문까지 단단히 걸어 잠궜지만 어디선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은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니, 내가 왜 이런 걸로 쫄아야 돼? 하면서도 괜히 등 뒤를 한번씩 바라보게 되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하얀 인터넷 창, 초록색 네모난 박스 안에 채워지는 글자는

 

[새들도 발정기가 있나요?]

 

 가람은 제법 진지한 표정을 마우스의 휠을 돌리며 검색된 내용을 훑었다. 대충 요약을 하자면, YES! 발정기를 제외하고 번식을 하는 동물은 인간 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동물들은 발정기에만 번식을 한다는 말이겠죠? 가람은 나름대로 친절한 설명에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며 내용을 마저 읽고는 몸을 돌려 바로 누웠다.

 

 

 

"뭐야, 그럼 주은찬도 그거 때문인가보네!"

 

 

 

 는 개뿔. 가람은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아무리 주작의 피를 이어받았다지만 은찬이 새일 리는 없었다. 은찬은 인간의 탈을 뒤집어쓰고 태어난다는-자신과 같은- 용족도 아니었고 청룡가문을 제외하면 백호, 주작, 현무 가문의 사람들이 동물의 족속으로 태어난 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그냥 선택받은 인간이란 뜻인 거지. 근데 왜? 가람은 다시 몸을 뒤집어 검색을 해보려 했으나 사신에 대한 이야기들이 공공연하게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닐 것 같지는 않아 그대로 두 팔에 얼굴을 묻었다. 괜히 두 볼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하여간! 그 녀석은 왜 그렇게 쓸데없이 착해선. 가람은 애써 모르는 척 하려 했으나 지난 밤 은찬의 손이 닿았던 곳들에서 열이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람은 요즘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것도, 순전히 은찬에게서 비롯된.

 

 

 

 

 

 

 

 F e t i s h

 

 

 

 

 

 

 

 처음엔 그저 사귀는 시간이 오래 지속되며 자연스레 스킨십이 진해진 것이라 생각했다. 원채 은찬은 다정한 성격이었고 자칫 어색해 질 수 있는 순간에도 요령 있게 잘 접근했었다. 은찬은 처음 손을 잡았던 날이나 입을 맞댔던 날부터 요 근래까지 몸을 맞대어 오는 타이밍에 있어서 너무도 자연스럽고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수줍은 것은 온전히 가람의 몫이었다. 그러나 요즘, 은찬의 모든 행동들은 평소에 비하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은찬이 가람의 몸에 닿는 횟수는 적어졌으나 스킨십이 적어질수록 은찬은 이상해져만 갔다.

 

 끈적하고 짙어졌다고 설명하면 될까.

 

 저녁을 준비할 때만 해도 식사준비를 돕겠다며 바짝 달라붙어 가람을 성가시게 하던 은찬은 오히려 멀찍이 떨어져서 가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싱글싱글 달라붙던 전의 눈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국의 간을 보며 삐딱하게 서있다가도 그런 은찬을 느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굳이 은찬임을 확인하지 않아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핥아 내리는 듯 한 시선은 뒷목에 소름이 오소소 돋으면서도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물론, 그 뿐이라면 고민조차 하지 않고 쳐다보지 말라며 몰아세웠을 가람이었으나 가끔 스치듯 닿는 은찬의 손길 또한 전과 다르게 미묘해져 있어 가람은 난감했다. 밥을 먹으며 가람의 손 옆에 있던 물컵을 가져갈 때 닿았던 손등이나, 져지의 깃이 접혀 있다며 정리해주며 목에 닿는 손마디, 찬장에 물건을 꺼내며 면티가 따라 올라갔을 때 옷을 끌어내려 주며 허리에 닿는 손, 이불 빨래를 밟으며 다리를 걷어 올렸을 때 흰 거품 사이로 진득하게 따라오는 시선들은 모두 가람을 불편하게 했다. 차라리 전처럼 귀찮게 들러붙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노골적이면서도 본심을 숨기는 눈빛과 행동들은 그것을 온전히 받아내는 가람으로 하여금 더 견뎌내기가 힘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 그 멍청이 때문에 왜 내가 머리가 아파야 하는 거야"

 

 

 

 어제 밤만 해도 그랬다. 설거지를 시켜놨더니 유리컵들을 왕창 깨먹은 현우 덕에 유리조각들을 정리하다 발에 유리가 박혀 들어갔다. 따끔한 느낌을 애써 무시하고 바닥을 치운 가람은 바닥에 잔뜩 피칠갑이 되어있는 것을 보고 놀란 은찬이 급히 달려와 발을 씻어내고 작은 조각을 빼낼 때 까지 유리조각이 박힌 줄도 몰랐었다. 유리조각 하나만 박혀서 그렇게 피가 날 리 없다며 온 발을 쓸어대던 은찬은, 차마 그 얼굴을 바라보기에 부끄러울 정도로 발을 매만져 댔었다. 아킬레스건을 따라 발목에서부터 발등으로 내려온 손은 발바닥 사이로 내려와 발꿈치에서 발가락 끝을 쓸었다. 입술을 물지 않았더라면 현우나 건이 보고 있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아찔한 순간이었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손가락이며 발 옆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는 손에 가람은 애써 숨을 참으며 어질어질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야한 손놀림이었다.

 

 그렇게 몸이 닳는다면 차라리 한 번 하자고 하지. 가람은 턱을 괴고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고 싶어도 못할 때가 있는 여자애도 아니고, 막말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참는 것인지, 가람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 몰라. 가람은 어떻게든 되겠지.하고 생각하는 것을 미뤄두기로 했다. 머리 아플 땐 게임이 최고지. 어느 폴더에 들었더라…. 주은찬 폴더였나. 가람은 끝도 없이 연결되어 있는 폴더를 클릭하고 클릭했다. 아, 어디다 둔거야! 가람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곤 끝이 보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폴더들을 눌러댔다. 어울리지 않게 바탕화면을 깨끗하게 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건덕에 늘 바탕화면을 간단하게 두어 북적거리는 것은 폴더뿐이었다.

 

 

 

"…직박구리?"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달칵이던 가람은 이름조차 바꾸지 않은 폴더를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이것저것을 모두 폴더에 모아두니 무엇이 들어있는지 항상 적어두던 폴더의 이름들 중 하나가 수상했던 것이다. 또 추잡스러운거 넣어둔 거 아냐? 가람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호기심이라는 게 한 칸 옆의 정체모를 폴더를 두고 얌전히 게임폴더를 누르게 두지 않았다. 딸칵딸칵,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가 또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괜히 죄를 짓는 듯 한 마음에 가람은 침을 삼키며 화면이 뜨기만을 기다렸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유난히 로딩 되는 속도가 느린 폴더에 바이러스가 들어있는 폴더인가?까지 의심하며 x표시를 누르려고 할 때였다.

 

 

 

"…사진?"

 

 

 

 언뜻 보면 모델들의 화보 같기도, 야한 사진의 부분을 확대해 놓은 것 같기도 한 사진들은 꽤나 많은 양이 있는 것인지 두어번 휠을 돌려 보아도 여전히 로딩 중이었다. 뭐야, 주은찬. 야한 사진이나 모아 놓고 있었던 거야? 가람은 괜히 꽁해지는 기분에 얕게 인상을 쓰며 천천히 나타나는 사진들 중 하나를 클릭했다. 사진들은 야하다고 하기엔 평범했고 그저 예술적인 측면을 위해 촬영했다고 하기엔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첫 번째, 옆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목에 사선이 길게 그어진 흑백의 사진. 그 사진은 부드러운 어깨선을 따라 뻗어나간 곧은 쇄골이 보였고 가슴골이 보일 듯 한 지점에서 끊어져 있었다. 그 다음, 잔득 거품이 인 욕조 안에 유려하게 뻗은 다리와 매끈한 발목 그리고 그 모두를 감싸고 있는 빨간 구두를 신은 여자의 다리 사진. 아찔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발랄한 욕조의 분위기가 상반되어 더욱 이질적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어두운 불빛 아래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남자의 등 사진. 불뚝 튀어나온 견갑골과 그 주변의 잘 잡힌 근육들은 너른 어깨를 만들었고 가늘게 내려와 단단한 허리를 만들고 있었다. 가람은 마른 침을 삼켰다. 사진은 대게 이런 식이었다. 하얗고 마디가 굵지만 길고 단단한, 기도를 하는 손을 찍은 사진이라거나 허리에서 골반으로 넘어가는 동그란 곡선과 장골이 유난히도 두드러진 사진. 가람은 모니터에서 차마 눈을 떼지도 못한 채로 숨만 깊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헐벗고 있는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으나 마치 그런 사진을 본 것 마냥 가슴이 두근댔다. 동그란 엉덩이가, 립스틱을 짙게 바른 질끈 문 입술이, 아슬하게 하부를 감춘 하얀 척추선이 가람의 심장을 좀 더 빠르게 뛰게 했다. 눈앞에서 매끈한 사진들이 수도 없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 끝에 생각나는 사람은…. 가람은 그저 목이 탔다. 쉴 새 없이 마른 침이 넘어갔다. 색스럽게도 웃어주는 점이 달린 입가나, 벌어진 수련복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가슴팍, 제법 근육이 잡힌 허벅지와 자신을 매만지는 핏줄이 불거진 손등. 어느새 모든 사진들은 가람이 아는 한 사람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무리 숨을 들이쉬어도 가슴이 콱하고 옭죄이는 듯 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 이상한 사진 때문이야! 마치 야한 영상을 처음 보는 아이처럼 후다닥 폴더를 끈 가람은 컴퓨터를 종료시키고도 한참이나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내쉬었다.

 

 

 

 

-

 

 

 

 

 그 후로 가람은 자신을 피하던 은찬만큼이나 그를 피하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억지로 눈이라도 마주치려 하면 은찬의 곳곳이 가람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찬장을 뒤적이며 먹을 것을 찾는 은찬을 돌아봤을 때 눈에 들어오는 은찬의 쇄골, 빨래 너는 것을 도와주겠다며 다가와 부딪히던 손, 수련복 바지 아래로 살짝 드러나는 복사뼈나 간을 보겠다며 씻자마자 바로 나온 등…. 가람은 그제야 저를 핥는 듯이 바라보았던 은찬의 시선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 또한 은찬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설상가상으로 애써 피하던 은찬은 누굴 보여주려는 건지 하의만 꿰어 입고 나와 목에 수건을 걸친 채로 가람의 곁에서 찌개의 간을 봤다. 아, 진짜 주은찬…. 가람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힐끔대며 제 곁의 은찬을 바라보았다. 제법 다부지게 잡힌 등 근육은 탄탄해 보였고 그새 어깨가 좀 더 벌어진 것인지 더 가늘게만 보이는 허리는 달려들어 안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내게 했다. 억지로 눈을 돌리며 바글바글 끓는 찌개 곁에서 가람은 속이 타들어 갈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얼마 전 보았던 사진과 교묘히 겹쳐보이는 것도 같았다. 현우와 백건은 여전히 수련을 하고 있는데. 조금만 안아보면 안 되는 걸까. 그럼 다른 걸 더 하고 싶게 될까? 가람은 더 이상 필요도 없는 파를 썰어대며 자꾸 은찬의 허리에 머무르려는 시선을 갈무리 했다.

 

 

 

"맛있다. 간도 딱 맞는데?"

 

"아, 그래? 그럼 됐어"

 

"응, 그럼 밥 차릴 때 불러. 도와줄게."

 

 

 

 가람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찬은 그저 웃으며 국자를 내려놓았고 가람은 돌아서서 사라지려는 은찬의 몸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썰고 있는 파에 집중했다. 통통통, 하는 규칙적인 소리와 함께 일정한 두께로 썰어지던 파는 은찬의 맨 팔뚝이 져지를 걷어올린 가람의 맨 살에 닿는 순간 흐트러졌다.

 

 

 

"…아…!"

 

 

 

 갑작스레 닿는 은찬의 온도에 놀라 불규칙해진 칼질은 가람의 손가락을 벴다. 손끝이 베이는 선명한 느낌에 가람의 입에선 저절로 소리가 샜다. 새빨간 피가 도마 위를 타고 흐르자 칼에서 손을 뗀 가람이 손을 모으며 입에다 가져다 댔다. 소리가 새어나오느라 벌어진 입 안으로 벤 손가락을 넣으려 할 때,

 

 

 

"정신 안 차리지, 청가람."

 

 

 

 은찬은 가람의 손목을 쥐곤 가람을 바라보았다. 당황하듯 붉어진 가람의 눈가를 진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은찬은 가람의 손가락에서 방울져 흘러내리는 피를 핥아 올렸다. 벌어진 살에 닿는 혀에 가람은 작게 움찔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고 은찬은 그런 가람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가람의 손가락을 입에 담았다. 혀끝으로 상처부위를 꾹 누른 은찬은 아랫입술을 움직여 가람의 손가락을 핥아올렸다. 묘하면서도 간질거리는 그 느낌에 가람은 크게 숨을 내쉬었고 기어코 입 안으로 손가락 모두를 빨아들이는 은찬에 가람은 놀란 눈으로 은찬의 눈을 마주했다. 흔들림 하나 없이 가람을 마주하는 은찬은 오히려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 눈을 바라보는 것을 즐기는 듯 한 은찬은 가람의 손가락을 빨아들이며 제 입에서 빼내었다. 은찬은 그 틈에 손을 거두려는 가람의 손을 다시 휘어잡으며 혀끝으로 손가락을 핥아내려 손가락 사이를 가볍게 물었다.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도 자신이 힘을 주어 잡고 있는 붉은 손목에 입술을 내려 이를 내곤 살살 긁어대었다.

 

 

 

"그…, 그만해, 주은찬"

 

"좋아해, 가람아…."

 

"…뭐?"

 

 

 

 

 

 

 

 

나는 오늘 고백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누나. 오랜만이에요. 네? 얼굴이 폈다구요? 하하, 연애는 무슨…. 짝사랑 중이에요. 아마 가망도 없는…. 말해달라구요? 아 좀 부끄러운데. 그리고, 말하기가 좀 그래요. 아, 알았어요. 말할게요. 어…. 말하기 껄그러운 이유는…. 친구거든요. 그것도, 나랑 같은 나이의 남자애….

 

 이해한다구요? 정말? 아, 그럼 한시름 놨다. 음, 그럼 어디부터 얘기해야 될까. 좋아하기 시작한 때요? 아, 그거 괜찮다. 누나 있잖아요, 나는 여자친구를 사겨보지 못한 건 아닌데도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믿지 않았어요. 같이 지내다보니 좋아지고, 괜찮은 점이 보여서 사귀곤 했거든요. 그런데 그 앨 좋아하게 된 순간엔 첫눈에 반하다는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어요. 진짜 한 번 보고 반했거든요. 진짜 별 모습도 아니었어요. 걔가 나한테 가슴 설렐만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고 나한테 말을 건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걔한테 반했지 뭐에요.

 

 

 

"야, 이쪽으로 패스!"

 

"아오 이 등신아! 저쪽에 빽건한테 패스해야지"

 

 

 

 그땐 학기 초였어요. 아직은 날이 엄청 쌀쌀해서 난로 곁이 옆자리였는데도 창문이 옆에 있으니까 엄청 추웠던 날들 중 하나였거든요. 그 날은 진짜 지루한 문학시간이었어요. 개학한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애들 반 이상이 수업시간에 쓰러져 잘 정도였거든요. 수업은 지겨워 죽겠는데 끝나려면 한참 남았고 진짜 잠도 안와서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어요. 빽건 알죠? 저랑 8년 친구라는. 마침 걔네 반 애들이 체육수업을 하길래 왔다갔다 움직이는 공만 열심히 쫓고 있는데 진짜 쪼그만 애가 막 공이랑 같이 빨빨대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뭐, 저도 딱히 큰 건 아니지만 저보다 작아 보이는 애가 공을 몰고 혼자 둘 셋을 제껴 가면서 막 골대 쪽으로 가길래 곧 골 넣겠다 싶어서 마냥 보고 있었죠. 그리고 골문이 가까워질 무렵 킥을 날리는데, 골 인거예요. 쪼그만게 제법하네 싶어서 피식피식 웃음이 새는데 골을 넣어서 신이난건지 자기 편 애들 쪽으로 막 뛰어가면서 웃더라구요.

 

 

 

 그때 반한거냐구요?

 

 

 

 …네. 골 앞으로 다가가던 진지한 얼굴이 무색하게 해맑게 웃는 그 애를 보는데, 기분이 너무 이상했어요. 쌀쌀한 초봄에도 땀을 막 흘려가면서 자기 편 애들 사이에 둘러싸인 그 애는 그냥 흔히 보던 남고애 중 하나였는데도 눈이 안 떼졌어요. 웃는 건 그 애인데 내 기분이 막 좋고, 난 그 곁에 있지도, 골을 넣지도 않았는데 내가 웃고 있고, 나도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활짝 웃는 그 얼굴이 진짜…. 예뻤거든요.

 

 가람이랑 첫만남은 그랬어요. 아, 그 애 이름이 가람이에요. 청가람. 이름도 예쁘죠? 난 이름 세글자가 그렇게 깨끗하고 맑게 울릴 수 있는지 가람이 이름을 부르고 처음 알게 되었어요. 중증이라구요? 뭐…. 부정하지는 않을게요. 하하. 진짜 이름도 예쁜 걸 어떡해요. 누나도 발음해봐요. 이렇게 이쁜 이름이 없다니까. 뭐 아무튼, 그 날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저는 빽건한테 달려갔어요. 반은 달라도 가끔 밥을 같이 먹긴 했으니까 빽건은 그러려니 했겠지만 내 목적은 당연히 가람이였죠. 이름은 뭔지, 어디 사는지, 빽건이랑은 친한지 궁금한 것들 투성이였거든요. 그렇게 막 달려가서 빽건 어깨를 딱, 잡고 달려오느라 가쁜 숨을 고르고 고개를 딱, 드는데 가람이랑 눈이 딱 마주친거에요. 선홍빛 눈이 나와 마주치는데, 나 정말 숨이 멎는 줄 알았어요. 순간 숨을 쉬는 걸 잊어버릴 정도로 당황해서 고개를 확 돌리고 빽건한테 횡설수설했죠. 가람이 명찰에 박힌 이름 세글자는, 밥을 먹으면서야 볼 정신이 생겼었어요. 이름은 그때 알게 됐고, 어디 사는지, 어떤 애인지도 알게 됐고, 그 얼굴에 다시 한 번 반했어요. 골을 넣고 웃을 때처럼 그렇게 해맑게, 엄청 자주 웃는 애는 아니었는데 또 무뚝뚝하게 대꾸하는 표정이 왜 그렇게 예뻐 보이는지….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모르겠더라구요.

 

 

 

"주은찬? 빽건 막교시 째고 토꼈는데"

 

"어? 진짜? 와, 자기가 같이 가자고 했으면서"

 

"불쌍한 놈…."

 

"그럼 가람이랑 같이 가지 뭐"

 

"누가 같이 가 준대?"

 

 

 

 아마 좀 더 친해진 건 처음으로 둘만 하교하던 날인 것 같아요. 그때만 해도 그냥 밥 가끔 같이 먹고, 가끔 같이 축구하고, 마주치면 그냥 인사만 하는 수준이었거든요. 물론 전 그걸로도 충분히 만족하긴 했지만. 가람이를 알게 되고 나서 빽건이랑 하교하는 날이 부쩍 많아졌는데 빽건이 학교를 째는 바람에 가람이랑 단 둘이 걷게 됐어요. 셋이 집 가는 길이 비슷했거든요. 평소처럼 이런 저런 얘길 하면서 길을 걷는데, 도로 한 복판에서도 어쩜 그렇게 가람이 목소리만 들리는지…. 가람이 목소리가 그렇게 큰 편은 아닌데도 말이에요. 전 괜히 들떠서 이런 저런 얘기를 막 해주다가 말이 끊겼는데도 신이 나서 콧노래도 막 불렀어요. 허밍하면서 걷는데, 가람이가 대뜸

 

 

 

"야, 너 노래 많이 알아?"

 

 

 

 하고 묻더라구요. 노래 듣는 건 좋아하니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가람인 그럼 카톡으로 들을만한 노래제목을 보내달라고 했어요.

 

 

 

"무슨 노래 좋아하는데?"

 

"딱히. 상관없어."

 

"음, 슬프거나, 신나거나 그런 것도 상관없고?"

 

"기왕이면 신나는 노래가 낫지. 슬픈 건 찌질해 보여서 별로야. 그럼, 부탁해"

 

 

 

 그 말을 뒤로 가람이는 자기 아파트단지로 들어갔고 전 그 말이 또 귀여워서 가람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어요. 그리곤 빨리 집으로 뛰어가서 노래 목록들 정리했죠. 가람이가 들어줬으면 좋겠다, 싶은 노래들을 고심하고 고심해서. PC카톡으로 대화창을 켜고 정리한 노래 목록을 보냈는데, 노래가 죄다 사랑에 빠진 노래 밖에 없는 거예요. 사랑을 시작하는 노래, 설레 죽겠다는 노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수줍은 노래, 사랑에 잔뜩 빠진 노래…. 가람이가 들어줬으면 하는 노래가 다 그런 식인 게 조금 웃기다가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어줬으면 싶었어요. 내가 그 노래를 들으면서 느끼는 기분을 가람이도 느꼈으면 좋겠고, 내가 골라준 노래를 들으면서 내 생각 한 번만 해줬으면 좋겠고. 그 뒤로 가람이가 노래 듣는 데에 재미를 붙였는지 오히려 저한테 이거저거 들어보라고 골라주더라구요. 웃긴 건, 가람이가 골라주는 노래도 죄다 온 몸이 간질간질한 노래들뿐이었단 거죠. 가람이가 추천해준 노래를 들으면 그 가사 속 주인공들은 나랑 가람이가 되어 있어서 더 좋았어요. 웃기죠? 겨우 골라준 노래 몇 곡에 그 날은 하루종일 기분이 좋다는 게. 사실 그 핑계로 연락을 한 번 더 하고, 가람이 목소릴 한 번 더 듣는 것도 좋은 이유 중에 하나였지만.

 

 우린 그렇게 조금씩 더 친해졌어요.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에서 조금 더 연락하고, 밤에도 부담 없이 불러내서 만나고, 휴일을 같이 보내기도 하고. 그러면서, 전 점점 힘들어졌죠. 친해지는 게 더 힘들었어요. 가람인 날 그저 친한 친구로 보는데, 내가 그 관계를 깨뜨릴 까봐. 나는 가람이 카톡 하나에도 설레서 졸린 눈을 비비면서 답해주는데 가람인 어느 순간 뚝, 카톡을 끊고는 잠들었다며 대답해 줄때나 내 앞에서 다른 친구들에게 더 웃어줄 때, 내가 아닌 사람에게 더 연락이 빨리 올 때나 상태메세지가 나와 다른 느낌일때…. 다른 친구들이 그럴 땐 아무런 느낌도 없는 무수한 일들이 가람이가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 눈에 밟혔어요. 유치한 일에도 질투가 나고, 혼자 설레고 혼자 실망하고. 우스운 짓만 반복했죠. 물론, 지금도….

 

 

 

 관둘 생각은 없냐구요?

 

 

 누나도 사랑해본 적 있으니 알 거 아니에요. 그렇게 수십번 실망하고, 가슴 아파하고, 포기할 거라고 말해도 아주 작은 관심 하나면 다 잊어버리는거. 진짜 이상한 게요, 조금만 관심을 덜 주려고 하면 더 눈에 들어와요. 조회 한다고 고만고만한 애들이 잔뜩 모인 강당 안에서도 가람이가 한 눈에 보여요.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작은 뒷통수인데도 그게 구분이 가요. 어쩜 그렇게 눈에 잘 들어오는지 신기할 정도로요. 어쩌다 스치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대요. 옆에라도 앉아서 가람이가 나한테 기대면 심장소리가 너무 커져서 가람이한테 들릴까봐 겁이 날 정도에요. 곁에 있으면서 조금 닿았던 팔이 떨어지면 아쉬워서 가람이가 닿았던 자리에만 자꾸 신경이 쓰이고 가끔 내가 가람이를 좋아하게 된 웃음을 지어주면 온 몸이 간질거려서 견딜 수가 없어요.

 

 

 

 진짜 웃기죠?

 

 

 

 가끔 나만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 너무 힘든데도 좋아요. 어쩌면 금방 사라질 감정일 수도 있고, 평생 동안 남아서 날 괴롭힐 수도 있는 감정이겠지만 포기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고백요? 하하, 글쎄요…. 고백해서 사귀고, 마음 놓고 가람이한테 좋다는 표현을 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서 엄두도 못내겠어요. 나는 가람이에게 내 마음을 다 얘기 한 뒤에도 가람이를 오래 좋아할 것 같은데 바라보지도 못하면 어떡해요.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 가끔 해주는 연락도 더 이상 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요. 그걸 생각하면 그냥 영원히 숨기고 이렇게라도 지내고 싶어져요…. 조금은 슬프지만.

 

 뭐. 그래도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누나. 덕분에 조금은 홀가분해졌어요. 앞으로 종종 와서 얘기해도 돼요? 가끔 가람이가 너무 예뻐 보이거나 속이 탈 때 올게요. 고마웠어요!

 

 

 

 

 

-

 

 

 

 

 

 어, 누나! 오랜만이에요. 네? 얼굴이 폈다구요? 하하, 진짜 누나 눈은 못 속인다니까. 이제 연애 중이에요. 옆에는 누구냐구요? 내 입으로 말하기 좀 쑥스러운데. 아, 알았어요. 말할게요. 어…. 애인이에요. 내가 그렇게 속앓이 하던, 나랑 같은 나이의 남자애…. 가람이요.

 남자는 해가 서산너머로 내리기 시작하는 것을 바라보며 궁을 나갈 채비를 했다. 그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은 태양빛에 더 붉게 빛나는 자신의 주작궁이었으나 해가 저무는 시점부터 다시 타오를 때까지는 달밤에 더욱 은은하게 빛나는 청룡궁에서 밤을 보냈다. 거추장스러운 복식을 벗고 지상에서처럼 가벼운 수련복차림을 한 남자는 오늘도 자신의 정원으로 향했다. 여름을 상징하는 주작궁은 그 의미처럼 늘 해가 찬란하게 빛났다. 특히나 그가 아끼는 그의 정원은 푸른 녹음 사이에서 붉디 붉게 빛나는 장미의 정원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남자는 늘 그랬던 것처럼 정원에서 자신의 머리색처럼 붉은 장미꽃을 한아름 꺾어 안아들곤 동향의 청룡궁으로 향했다.

 

 

 

"주작님 오셨습니까"

 

"휘는?"

 

"휘아님은…."

 

"아빠!"

 

 

 

 태양빛에도 푸른 기와가 은은하게 비추는 청룡궁은 늘 그렇듯 은찬을 맞이했다. 여럿의 시종이 줄에 줄을 이어 그의 앞에 서 머리를 조아렸지만 은찬은 그저 그들 너머로 다른 이를 우선 찾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찾을 때 마다 품 안의 붉은 장미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향을 내뿜었다. 시종 중 하나가 그가 찾는 이에 대해 운을 띄우기도 전에 주작궁의 온 마루가 작은 발소리로 가득 차며 작은 아이가 얼굴을 내비췄다. 댓살이 겨우 된 듯 한 아이는 도도도도 하는 가쁘고 어린 소리를 내며 은찬에게로 달려왔다. 품 안의 줄기가 혹여 아이에게 상처를 입힐까 주위의 시종에게 꽃다발을 맡긴 은찬은 달려오는 아이를 한 품에 안아 올렸다.

 

 

 

"응, 오늘도 잘 있었어? 오늘은 우리 휘가 보고 싶어서 조금 일찍 왔어"

 

"휘도 아빠 보고 싶었어!"

 

 

 

 아이는 은찬의 목을 좀 더 꽉 끌어안으며 가까이 밀착했다. 아이의 갈색빛 머리칼이 은찬의 턱을 간질였고 은찬은 그것을 보며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는 종일 이 순간만을 기다린 것 마냥 은찬에게 매달려 부벼대었다. 그저 웃으며 머리를 쓸어주니 휘의 선홍빛 눈이 은찬을 마주했다. 은찬은 한참이고 그 눈을 내려다보았고 그 모습에서 누군가를 떠올린 듯 기분 좋게 휘어진 눈으로 휘를 데리고 밖을 나섰다.

 

 주작궁이 여름을 상징한다면, 청룡궁은 봄이었다. 계절이 시작하는 시기인 만큼 청룡궁은 그 주인의 힘이 미약하여도 늘 만개한 봄의 날씨인 채였다. 짙푸른 녹음이 아닌, 수줍게 싹을 틔우는 연둣빛 잎들과 봄의 수줍음을 닮은 연하고 여린 꽃들은 석양에 비칠 때면 얼굴을 붉히던 그 주인과 닮아 있었다. 부끄러워 좋아한단 말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제 곁의 청룡. 은찬은 그를 떠올리며 아이를 조금 더 바짝 끌어안았다. 어느 곳이던 날이 좋은 청룡지에서도 두 남자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너른 들이었다. 늘 얕게 자라있는 잔디는 그 어느곳 보다도 푹신했고 그의 손길처럼 간질거리는 바람이 수도 없이 부는 곳. 은찬은 그 중앙의 커다란 나무 아래로 천천히 걸어가며 주변을 눈에 담았다. 언제와도 변함이 없는 곳. 은찬은 그 곳에서 함께 누워 잠을 청하던 언젠가를 떠올렸다. 그리도 행복했던, 어린 날. 몸은 언제나 같은 모습을 유지하겠지만 그 날은 다시 올 수 없음을 역겁의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된 만큼 은찬은 추억 속에 자리한 둘의 모습이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아빠-. 근데…."

 

"응, 휘아야"

 

"아빠는 왜 맨날 꽃을 가져 오는 거야?"

 

 

 

 목에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은찬의 목덜미를 간지럽혀 대던 휘가 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붉은 눈동자를 바라볼 때 마다 자꾸만 누군가가 생각이 나서, 은찬은 그저 웃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를 닮아 예쁜 아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은 자신이 평생을 가슴에 담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은찬은 꼭 그에게 말하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더 밝게 웃어주며 대답했다.

 

 

 

"좋아할테니까. 좋다고 말은 못해도 속으론 좋아할 사람이거든."

 

 

 

 그 말을 들은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찬이 말해주는 것의 반은 알아들었을까 싶었지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흰 들꽃이 만발한 곳을 가리키며 은찬의 옷자락을 붙잡아 끌었다.

 

 

 

"아빠! 저기 꽃!"

 

"응, 꽃이 잔뜩 피었네?"

 

"나도 엄마한테 꽃 줄거야"

 

 

 

 외모는 청룡을 쏙 빼다박았지만 성격은 은찬을 닮은 것인지 매사에 겁이 많아 은찬의 품이 아니면 청룡궁 밖을 벗어나지도 않는 아이가 은찬을 세워 꽃들 사이로 달려나갔다. 은찬은 제 품을 빠르게 빠져나가는 아이를 따라 꽃이 만발한 속을 헤집었다. 은찬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아이가 벌써 저만큼이나 컸어, 은찬은 휘를 보며 빈 허공에 읊조렸다. 아이 키의 반쯤 될까 싶은 작은 꽃들이 아이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휘는 꽃들의 속에서 제 손톱만한 작은 들꽃들을 꺾어나갔다. 가는 꽃들이 모이고 모여 은찬이 가져오던 꽃다발의 크기만큼 커지자 아이는 한아름 안고있는 다발을 들고 웃으며 은찬에게로 달려왔다.

 

 

 

"엄마 선물이야!"

 

 

 

 그에 은찬은 웃으며 대답했다. 응, 엄마가 좋아하겠다. 아이는 웃으며 다시 은찬에게 안기려 보챘고 은찬은 아이를 다시 안아올리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벌써, 엄마생각 할 줄도 아네."

 

"응, 맨날 아빠가 두는 그 꽃병에 꽂아 둘거야"

 

 

 

 은찬은 그 말에 그저 아이를 소중히 안고는 청룡궁으로 향했다. 좋아해 줄까? 아이가 너를 위해 처음 가져다주는 선물을. 은찬은 걸음을 바삐했다.

 

 

 

 

 

-

 

 

 

 

 

 청룡궁에 다다랐을 때, 아이는 서둘러 은찬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은찬은 평소와 다른 휘의 반응에 놀라 떨어지려는 아이를 단단히 고쳐 안았고 아이는 내려달라는 소리만을 반복하다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흡, 하고 놀라 숨을 마신 것 같기도 했다. 그에 은찬이 고개를 돌렸을 때, 또 하나의 목소리와 함께 푸른 머리칼을 휘날리는 가람이 삐딱하게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

 

"주은찬! 애 자꾸 안고 다니지 말랬지"

 

"아냐, 휘 이제 내려갈거야, 응, 내려가!"

 

"니가 맨날 안고 다니니까 애가 자기 발로는 한발자국도 안 움직이려고 하잖아"

 

 

 

 가람은 얕게 인상을 쓰며 다가와 은찬의 품에 안겨있는 휘를 내려두었다. 휘보다 좀 더 어린 듯 한 아이는 은찬을 보자마자 신이나 은찬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고 은찬은 멋쩍게 웃으며 가람을 바라보았다.

 

 

 

"화내면 애기한테 안 좋아"

 

"뭐. 애 한 두 번 품어 본 것도 아니고. 이정도는 해줘야 애가 적당히 순해"

 

 

 

 은찬은 가람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가람의 배로 손을 가져다대며 웃었다. 배가 조금씩 불러오기 시작한 후로는 정복을 입지 않은 덕에 수련복 아래로 바로 느껴지는 배는 체온이 높은 은찬의 손과 온도가 딱 맞았다. 아빠가 하루 종일 보고 싶었어요, 우리 아가. 은찬이 배를 살살 문지르며 얘길 꺼내자 가람은 그저 눈을 흘겼다. 하여튼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능글맞아져요. 투덜대며 무어라 얘기를 더 꺼내려는데 둘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휘가 가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흔들어대었다.

 

 

 

"엄마, 엄마. 이거…."

 

"…이게 뭐야?"

 

 

 

 가람은 건네지는 하얀 들꽃 다발을 받아들며 되물었다. 선물이야! 하며 환히 웃는 아이는 멍한 가람의 표정을 살피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거 맞나? 아빠가 좋아할 거라고 했는데. 아이는 입술 끝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가람이 반응하길 기다렸다. 가람은 꽃다발과 아이의 얼굴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더니 발개진 눈을 하곤 자세를 낮추어 휘를 끌어안았다. 나도! 나도! 하고 은찬에게 매달려 있는 아이가 가람에게 달라들었다. 가람은 그렇게 두 아이를 한참이나 끌어안고 있었고 은찬은 가람의 얼굴아래 땅이 젖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고마워, 고마워, 아가. 엄마, 너무 기분 좋다."

 

 

 

 

 

-

 

 

 

"많이 컸지?"

 

 

 

 은찬이 붉은 장미꽃과 하얀 들꽃을 꽃병에 정리하며 가람에게 물었다. 겨우 두 아이를 재우고 자신의 침실로 돌아온 가람은 은찬의 등을 끌어안은 채였다. 가람은 대답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은찬은 자신의 배쪽으로 둘러진 가람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보들한 손등을 쓸어주었다. 가람이 고개를 묻고 있는 등언저리가 뜨거웠다. 은찬은 몸을 돌려 가람을 끌어안아 주었다. 이러다 얼굴 붓겠네. 두 뺨을 감싸 여전히 발간 눈가를 닦아내 주며 은찬은 말했다. 이번엔 딸일까? 애기 엄마가 너무 감성적인 것 같아. 그런 은찬의 말에 가람은 찡한 코끝을 애써 무시하며 은찬을 쏘아보았다.

 

 

 

"그렇게 봐도 사랑스러운 걸"

 

"시끄러. 입만 살아선"

 

"근데, 딸이었으면 좋겠다. 가람이 너랑 똑 닮은"

 

 

 

 아마, 우리집 최고의 공주님이 되지 않을까? 나중에 시집은 어떻게 보내지? 그냥 평생 우리가 데리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널 닮은 사랑스런 여자아이라면. 가람을 보던 눈을 굴리며 은찬이 말했다. 가람은 한마디만 덧붙일뿐이었다.

 

 

 

"하여튼, 김칫국부터 마시긴. 애가 다 듣는다, 너"

 

"뭐, 막내 왕자님이라도 행복하겠지만."

 

 

 

 은찬은 가람의 눈가에 입맞춰 주곤 가람을 껴안고 뒤뚱뒤뚱 침대로 향했다. 가람을 침대에 뉘이고, 옷을 편하게 정리해준 후 자신도 그 곁에 누웠다. 바로 머리에 손을 괴곤 가람을 바라보며 배를 쓸어댔지만 가람은 그저 은찬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을 뿐이었다.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며 가람은 조근조근 이야기를 꺼냈다.

 

 

 

"나 있잖아"

 

"응"

 

"솔직히 너랑 처음 만났을 때도 아니, 니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도 이렇게까지 행복해질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난 늘 이 순간을 그려왔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너랑, 너와 함께할 우리 애기들이랑 언제나 이렇게 행복하기만 할 순간을, 늘 상상해왔었어"

 

"진짜?"

 

 

 

 가람은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은찬을 바라봤다. 뭐야, 그런 상상해온 거였으면 나한테 말해주면 좋잖아. 그럼 상상만으로도 행복했을 텐데. 조금 투정이 섞인 말투에 은찬은 웃었다. 원래, 선물은 모르고 받아야 더 놀랍고 행복한거잖아. 은찬이 가람의 귓가에 속삭여주며 가람의 배를 둥글게 쓸었다. 가람을, 그리고 가람의 배를 바라보는 은찬의 눈은 고요하고, 다정했다.

 

 

 

"아가, 엄마 고생시키지 말고 건강히 나와서 아빠랑, 엄마랑 오빠나 형아랑 같이 다 행복하자?"

 

 

 

 그에 가람은 또 새침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은찬에게 대꾸하려다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런 가람의 행동에 은찬 또한 쓸던 배를 멈추며 놀라 동그래진 가람의 눈을 바라보았다. 은찬의 손 아래에서 가람의 심장소리가 아닌, 다른 둔탁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가람은 자신을 바라보는 은찬의 눈을 보며 두어번 깜빡였다. 이것은 두 번의 출산을 겪은 부부에겐 익숙하면서도 늘 새로운 움직임이었다.

 

 

 

"방금, 느꼈지?"

 

 

 

 동시에 내뱉은 말에 둘은 눈을 마주하며 웃었다. 행복은, 늘 함께 온다.

 

그리고 그 행복은 늘 눈이 부시도록 빛이 난다.

 

 

 

 

 

 

 

 

*

 

벌써 30일이 되었네요.

이제 하루만 더 있으면 정말정말 좋아했던 두 아이들이 가요. 늘 행복하겠지만, 끝의 끝에서도 행복하길 바라면서..

너희는 애 셋 낳고 꼭 행복해야해ㅠㅠㅠㅠㅠㅠㅠ

은찬아 가람아! 너희 때문에 정말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했어. 이 글을 볼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행복해야해! 고마웠어!

 

덧붙이자면 휘는 그냥 아명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빛날 휘.

휘아는 빛나는 아이라는 뜻에서 시종들이나 직위가 낮은 사람들이 휘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라고 혼자 설정한..ㅎㅎ..ㅎ

나머지 자잘한 설정들은 스루합니다

아 그리고 찬가람네 막내는 절대적으로 딸입니다. 아들-아들-딸이어야 해요.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