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은 파란색 니트를 꿰어 입었다. 팔을 하나씩 끼워 넣고 머리를 빼내는 동작은 잠에서 덜 깬 아이마냥 느릿했다. 머리와 니트자락이 닿는 순간은 아주 짧았지만 정전기가 올라 귀 사이로 빠져나온 애교머리는 볼에 달라붙었고 머리칼은 잔뜩 일어나 부스스해졌다. 그러나 가람은 그것에 신경을 겨를이 조금도 없는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나 멍한 채 있었을까, 가람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는지 니트 밖으로 반쯤 삐져나온 손으로 천천히 머리를 정리했다. 눈 둘에 코 하나, 입 하나. 보기 흉한 상처는 없고, 특이한 것이라면 빨간 눈? 얼굴이 좀 얄상하단 소리는 들어봤지만 딱히 남자에게 잘 먹힐만한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가람은 거울에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다 머리를 정리하던 손을 내렸다.
"정말 날 좋아하는 게 맞아?"
가람은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가람은 까만색 크로스백을 매곤 현관을 나섰다. 복잡한 가람의 마음과는 다르게 하늘은 맑고 맑았으며 꽃샘추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완연한 봄의 날씨가 가람을 맞았다. 겨울 내내 엉성했던 가지는 어느새 온통 연둣빛이었다. 벌써 싹이 나나? 그럼 곧 벚꽃도 피겠네. 아직은 여유로운 출근길에 가람은 느린 걸음을 더 늦추며 가로수들을 구경했다. 도서관 앞이 다 벚나무라고 했었지…. 다 피면 예쁘겠다. 그거 쓸어내려면 좀 귀찮겠지만. 만개할 벚나무를 상상하며 내내 하던 고민도 잊은 채 가람은 걸음을 옮겼다. 꽃을, 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봄이란 건, 특히 봄의 벚꽃이란 건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들뜨게 하는 재주가 있었으므로 가람은 드문드문 연분홍빛이 보이는 벚나무를 눈에 담으며 걸었다. 괜히 마음이 들떠 콧노래를 흥얼거리려는데 제법 차갑지만 밉지만은 않은 바람이 가람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고 지나갔다. 가람은 머리를 헤집는 바람에 크로스백의 끈을 꽉 쥐었다. 괜한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와, 이걸 기억하고 있었어요? 아무리 졸업한지 얼마 안됐다고는 하지만 이런 거 보통 여기서 다시 외우거든요. 나도 그랬고'
'…면접 보면서 혹시 물어볼까봐 다시 공부 했었어요.'
'그래요? 그래도 대단하다, 가람씨'
방금 제 머리를 스친 바람결처럼, 칭찬이랍시고 제 구실 다 하게 자란 성인남자의 머리를 살살 잘도 쓰다듬는 그 남자는, 생각해보면 그런 말도 안 되는 고백을 하기 전부터 제법 티를 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나던 그 날부터 차근차근 짚어보아도 남자는 매사에 다정했었다. 가늘고 길게, 있는 듯 없는 듯. 최대한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고 살고 싶어 뻣뻣하게 대하기만 했던 첫 만남에도 남자는 붉은 머리 뒤로 손을 얹어 하하, 웃으며 가람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나는 주은찬이에요. 여기서 일한지는 3년 정도? 내가 선배니 편하게 가람씨라고 부를게요.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여도 남자는 제가 할 말까지 다 해대며 가람의 곁에 붙어있었다. 책을 정리하고 있으면 자연스레 어깨에 올라와 있는 손이라던가, 눈이 마주치면 피하기 바쁜 저와 다르게 여유롭게 웃어주며 건네는 말이라거나, 나직하고 부드러운 게 딱 듣기 좋게 영화 좋아해요?하고 물어오는 목소리라거나. 척 보기에도 여자 여럿 울렸을 것 같이 다정함이 몸에 베인 은찬은 가람에게 같은 남자라도 괜히 속 안이 간질거리게 하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필요이상으로 다정할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늘 들게 하는. 또 칭찬엔 어찌나 관대하신지, 조금 일찍 도착해 창문을 열어두는 것만으로도 머리를 쓸어주며 부지런하다느니, 덕분에 아침이 참 상쾌하다느니 등의 말을 줄줄 꺼내놓는 사람. 그가 바로 은찬이었다.
가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근데 그렇게 칭찬을 해줄 때 머리에 닿는 그의 손은 좀 따뜻했던가. 가람은 괜히 뜨끈해지는 정수리를 애써 무시하곤 꿋꿋이 걸어 나갔다.
"아, 선생님 얼굴 어떻게 보지…."
그제야 다시 스물스물 밀려오는 고민에 가람은 입술 끝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저번 주, 그러니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금요일이었던 그 날은 확장공사를 마치고 재개관을 하는 고운시립도서관의 마지막 리모델링 기간이었다. 3월 2일자로 시립도서관의 사서로 발령이 난 가람은 첫 출근부터 수백 권의 책을 정리하고 목록하며 분류하는 일을 맡아야 했으나 쉴 새 없이 일해도 끝이 나지 않은 책 정리에 결국 마지막 날-금요일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까지 야근을 해야만 했다.
'가람씨는 집이 어디에요? 멀다고 했었나?'
'아뇨, 한 20분 걸으면 돼요. 남들은 한 10분에서 15분 정도 걸린다는데 제가 걸음이 좀 느려서'
'그렇구나. 개관일 맞추려면 오늘 제때 퇴근 못할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죠, 뭐'
'음, 이왕 늦게 끝나는 거 같이 저녁 먹고 들어가요. 데려다 줄게요.'
그때 고개를 끄덕인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고, 가람은 생각했다. 저녁이야 그렇다 쳐도 쌀쌀한 봄 밤, 20분 걸어가는 것이 귀찮아 차를 얻어 탄 덕에 가람은 주말을 내내 멍한 기분으로 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겨우 책 정리를 끝내고 지친 몸을 근처의 삼겹살집의 고기로 위로를 한 가람은 제법 신이 난 기분으로 은찬의 차에 올랐었다. 지긋지긋하던 책 정리는 당분간 안녕인 것도 좋았고, 주말이 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쉴 수 있게 된 것도 좋았으며, 냄새가 배는 것 하며 귀찮은 것 하며 집에선 잘 먹지도 않는 고기를 먹은 것도 좋아 가람은 방방 뜬 기분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응, 잘 들어가요.'
쌀쌀한 날씨에 손을 불어가며 퇴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즐겁던 가람은 평소보다 조금 더 들뜬 기분으로 은찬에게 인사를 건네곤 차에서 내리려 했다. 내리려고 했었다. 안전벨트만 잘 풀렸다면. 그러나 어째서인지 벨트는 아무리 눌러도 풀리지 않았고, 나름 인상까지 써 가며 벨트를 풀어보려 했지만 옷이 끼인 것인지 버튼은 조금도 눌리지 않았다. 기어이 벨트가 잘 안풀려요? 하고 몸을 튼 은찬이 벨트를 푸는 것을 도와주었고 정말 우습게도, 안전벨트는 은찬의 손이 닿자마자 스르륵 하고 풀려 버렸다. 허탈한 심정으로 한 번에 풀려버린 버튼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을 때, 가람은 자신이 너무 무방비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나치게 친절한 은찬은 안전벨트를 제 자리에 돌려주기까지 했고, 그 덕에 가람은 조수석의 가장 끝에 있는 벨트를 올리기 위해 가까워진 은찬의 얼굴, 자신의 목 뒤쪽 언저리에 닿은 손, 숨만 쉬어도 숨결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를 하나하나 느끼며 숨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갑자기 숨이 확 쉬어지면 어떡해. 가람은 그저 앞만을 바라보며 얼굴이 벌게지도록 숨을 참았다.
'왜, 왜 이렇게 친절해요…!'
그렇게 안전벨트가 제 자리를 찾고야 자리로 돌아간 은찬을 보고야 순식간에 긴장이 풀린 가람은 몇 번을 생각해도 얼토당토않은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제 머를 죄다 쥐 뜯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말도 안 되는 질문에 그는 뭐라고 대답했던가.
'좋아하니까요'
'…네, 네? 네?!'
'내가 가람씨 좋아한다구요. 사실 쭉 지켜봐 왔어요. 꽤 오래.'
가람은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끼며 제 앞에 펼쳐진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니까, 늦게까지 일을 하고 저녁을 먹고 차로 데려다 주는 상황…부터가 이상했구나. 단 둘이 있는 차안은 언제 어떤 묘한 일이 일어난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공간이었다. 심지어 그 상황에 고백할 빌미를 준 것은 가람 자신이었다. 물론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자신의 상사는 제 얼토당토 하지도 않은 말을 놓치지 않고 좋아해 왔다고 고백했다. 가람은 저절로 마른 침이 삼켜졌다. 놀라 고개를 돌린 시선 앞엔 늘 기분 좋게 웃고 있는 눈이 있었다. 솔직히, 그 눈웃음에 늘 약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늘 같은 표정으로 바라봐 주며 가람씨,하고 부를 때면 목 언저리가 간질간질 했다. 괜히 두근대는 것 같은 기분을 억지로 눌러낸 적도 있었다. 아니라고, 아닐 거라고 애써 부정해 왔던 감정들은 은찬의 고백으로 봇물이 터지듯 흘러나왔다. 그래. 사실은 나도….
'아…, 그, 저도, …해요.'
'네?'
'저, 저도 좋아한다구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그때까지 연락하지 마세요!'
'가람씨!'
'워, 월요일에 봬요'
빼-액, 말을 내 뱉은 가람은 후다닥 차에서 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뛰어 들어갔었다. 늘 올라가는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을 단숨에 올라 쿵쿵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가람은 문에 등을 기대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 앞에서 딸꾹질을 하지 않은 것이 대견할 정도로 놀란 가람은 벌떡벌떡 뛰어대는 가슴이 가라앉을 때 까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목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내쉬며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미쳤어, 청가람….'
겨우 진정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섰을 땐 거울에 비친, 여전히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만이 가람을 맞아주었다. 그 빨개진 얼굴을 마주한 순간부터야 가람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보통 고백이 다 이런가? 가람은 제대로 된 대화도 아니었던 것 같은 차 안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너무 놀라 갑자기 내뱉은 말에 진지한 고백. 하지만 그 고백에도 어수선한 말만 잔뜩 내 뱉은 나…. 그럴 리가 없지. 아, 망했어, 진짜. 좀 더 진지하고 차분하게 말할 걸. 목소리까지 덜덜 떨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최악이다. 그렇게 가람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향해 발길질을 해대며 그 밤을 꼴딱 새웠었다.
'좋아하니까요'
가람은 좋아한다 말했던 은찬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선 한숨을 내쉬었다. 은찬과 함께 일하게 된지 겨우 6주가 되는 날이었다. 생각해보면 겨우 6주라는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동안 둘은 꽤나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은찬은 늘 다정했고, 가끔 잘 들어갔냐는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주말엔 함께 영화를 보러가기도 하고 은찬의 차로 한강대로변을 달리며 기분전환을 하기도 했었다. 아, 데이트였네. 가람은 이제야 깨닫게 된 은찬과의 만남들을 곱씹으며 지지리도 눈치가 없던 자신을 탓했다. 가끔 받는 연락은 즐거웠다. 몇 글자로 하루의 피곤이 싹 씻겨 내려갈 수도 있다는 것을 은찬과의 메시지에서 알 수 있었고 먼저 연락이라도 하는 날엔 -답장이 안올리는 없었지만- 답장을 기다리며 하루 종일 휴대폰을 붙잡고 있기도 했다. 그와 함께 보는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멜로영화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고 함께 달렸던 한강대로변은 뭣도 없는 겨울의 거리에 가까웠지만 특별했다.
"와, 나 좀 심하긴 했구나."
가람은 가방의 끈을 단단히 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좋았음에도 어쩜 그렇게 둔했는지. 게다가 고백 받을 땐 최악이었고. 스스로 머리를 콩,하고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게 봐주었을 사람이니 가람은 이제부터라도 만회 하고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일단 대답부터 제대로 다시 할 생각이었다. 저도 선생님이 많이 좋아요. 우리 사귈래요? 가람은 주말 내내 연습했던 말을 다시 되뇌었다. 이번엔 정말 잘해야 해. 내내 고민하고 연습한 말이니까. 가람은 마른 침을 삼키며 언제쯤 저 말을 꺼내야 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 답을 할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은, 우습게도 어떤 예능프로그램 덕분이었다. 갑작스런 고백에 어설프게 답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려 그것을 어떻게 만회해야 하나에 대해 생각 하느라 집은 온통 조용했다. 역시 내 태도가 조금 애매했을까. 사귀자고 하는 게 나을까? 깊게 고민을 하다 보니 문득 적막해진 집이 머쓱해 가람은 텔레비전을 틀어 시끌시끌한 예능프로그램을 틀어두었었다. 틀어놓은 예능프로그램에선 말을 잘하기로 소문난 여자 게스트가 나와 재잘댔고, 그녀는 깊게 파인 브이넥티 사이로 보이는 가슴을 출렁이며 꽤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그 사람과 키스하는 상상을 했을 때 좋으면 사귀어요'
꽤 오랜 시간 깔깔거리면서 흘러나온 이야기들은 모두 귓가로 스쳐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은 어찌나 귀에 내다 꽂는 것 같던지. 가람은 홀린 듯 텔레비전을 주시했다. 키스? 키스하는 상상이라….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을 하며 가람은 머리를 굴려 은찬을 상상했다. 붉은 머리칼과 저를 볼 때면 늘 반쯤 접혀 있는 눈, 늘 웃고 있는 입과 그 곁의 작고 까만 점. 이거, 악역들만 있는 그거 아니에요?라고 물었던 적이 있는 그 점은 늘 입술에 먼저 시선이 가게 만드는 묘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 이렇게만 생각해도 꽤나 간질거렸다. 키스하는 상상까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흠, 흠. 가람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유독 눈에 들어오던 입술을 주시하며 상상 속의 은찬에게 다가갔다. 한걸음, 한걸음.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슴이 또 둥, 둥 울려대었다. 은찬의 앞에 멈추어 서서는 여전히 웃고 있는 은찬의 두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개를 살짝 틀고, 눈을 감는 그 순간, 상상 속의 은찬은 또 좋아해요,하고 말을 했다.
'내가 가람씨 좋아한다구요. 사실 쭉 지켜봐 왔어요. 꽤 오래.'
그렇게 가람의 입술과 은찬의 입술이 닿는 순간, 가람은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가볍게 두근거리던 심장은 어느새 쥐어짜내기라도 하듯 아프게 내리 앉았다. 그것은, 좋은 느낌이라고 하기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했으나 가람은 알 수 있었다. 좋다 못해 아프도록 설레는 기분이었다. 숨은 턱턱 막히고 몸은 뻐근하고 속은 갑갑했다. 그래도 좋았다. 그것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고 심장이 두근거려 어찌할 줄을 모르는 감정이었다. 놓쳐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가람은 생각했다. 역시, 다시 제대로 고백해야 해. 그렇게 제 감정을 정의하고 나서는 주말 내내 머리를 싸매며 고민해야 했다.
"아…, 다 왔다"
가람은 자동문 앞에 멀찍이 서서 문을 올려다보았다. 가람이 일찍 출근하는 편이었으니 은찬은 안에 없겠지만 들어가면 정말 무엇인가를 시작이 될 것만 같은 설렘에 속이 울렁였다. 어떻게 운을 띄워야 하지. 아니 그 전에,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해도 되는 걸까. 가람은 제 대답에 늘 웃는 은찬의 표정이 떠올랐다. 또 잔뜩 부끄러워져서 엉뚱한 말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람은 마른 침을 삼키곤 문 안으로 들어섰다. 사원증을 들곤 경비를 해제하려는데 평소와 달리 노란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가람은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어…? 금요일 날 분명히 둘이 문단속을 하고 갔는데 빨간불이 아니라 노란불이 들어온다는 건…. 가람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먼저 와 있는 거겠지. 눈을 꽉 감고 문에 머리를 콩, 박았다. 정신 차리자 청가람. 너는,
"아, 가람씨 왔어요? 바빠요. 얼른 이것 좀 도와줄래요?"
도와줘야 할 사람이니까…. 가람은 고개를 끄덕이다 눈을 번쩍 떴다. 어, 이게 아닌데? 가람의 눈앞엔 잡다한 것들이 잔뜩 들어있는 상자를 옮기는 은찬이 보였다. 은찬은 그런 가람에게 눈길을 줄 시간도 없는지 바삐 걸음을 옮기며 창고로 향했다. 갑작스런 습격에 어안이 벙벙해진 가람은 일단 안으로 들어서 가방을 내려놓았다. 창문이 활짝 열려있음은 물론이고 평소보다 더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는 사무실을 바라보며 가람은 휴대폰을 꺼내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8시 33분. 늘 도착하는 시간보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은찬이 저렇게 급해하며 몸을 움직일 정도는 아닌 시간이었다. 평소라면 오지도 않았지.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는 상황이었으나 가람은 30분전, 그러니까 가람이 집에서 나갈 즈음 은찬에게서 메시지가 온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가람씨! 오늘 재개관한다고 시장님께서 오신 다네요. 여기저기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일찍 와줄 수 있죠? 갑자기 마안해요. 나도 막 연락받은 거라.]
아…. 가람은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되었지만 저 멀리 빠진 넋을 다시 몸으로 데려오는 데에는 조금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한 듯 싶었다. 창고에 잡동사니를 쌓아둔 은찬이 여전히 멍한 가람을 보곤 눈앞에서 그의 손을 흔들어댔다.
"우리 지금 급하다니까요? 얼른 여기 치우고 회의실이랑 관장실도 치워야 해요. 얼른!"
그의 말에야 비로소 가람은 얼떨떨한 고개를 끄덕이며 청소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
"아, 죽겠다."
그리고 하루는 정말 진절머리가 나도록 바빴다. 도서관과 관련된 높은 사람들은 쉴 새 없이 방문하여 이런저런 덕담을 늘어놓고 갔고, 평일, 그것도 월요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디서 그렇게 사람들이 쏟아지는 것인지 책을 빌려주는 것만으로도 종일 엉덩일 의자에 붙일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학교를 마치고 온 초등학생 아이들마저 은찬에게로 졸졸 쫓아와 선생님이 보고싶었다느니, 이제 또 책을 읽어주실거냐느니 재잘재잘 떠들다 사라졌다. 가람이 은찬을 본 것은 그 시간 잠깐 뿐이었다.
그렇게 6시, 도서 열람실의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서야 가람은 하루 종일 시달린 몸을 의자에 앉힐 수 있었다. 아니, 이전엔 어떻게 혼자 다 했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람은 진이 쏙 빠져있었다. 재개관을 두 번 했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가람은 도서를 대여/반납해주는 데스크에 털썩 엎드렸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순식간에 노곤해지는 몸에 그저 가만가만 숨을 내쉬던 가람은 제 곁으로 가까워져 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는 귀가 오똑 섰다. 이 시간, 이쪽으로 오는 사람은 은찬 밖에 없을 테니까. 그 이름을 떠올림과 동시에 가람은 바쁜 하루에 치여 미뤄두고 있었던 고민들이 목 끝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 어떡하지, 어떡하지. 같은 생각만 줄기차게 머릿속을 맴도는데 어느새 곁에 바짝 다가온 은찬은 가람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가람을 불렀다.
"가람씨"
"……."
"자요?"
"…아니요."
"많이 피곤하죠?"
그에 가람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머리에 올라온 따뜻한 손이 가람의 머리를 살살 쓸어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곤했는데, 방금 전까진 피곤했는데. 가람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대며 가만히 은찬의 손길을 받아내었다. 머리 위에 올라온 손은 늘 이정도의 온도였다. 미지근하지도, 차지도 않은 딱 따뜻한 온도. 그러니까, 잔뜩 피곤한 몸을 담구었을 때 딱 몸이 풀어질 만한, 그런 물의 온도. 어느새 녹진하게 풀어지는 몸에 가람은 두 팔을 베고 있던 고개를 들어 은찬을 바라보았다. 여전한 미소였다. 늘 자신에게만 지어주었으면 하는 그 미소. 은찬은 데스크의 끝에 살짝 앉아선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는 가람과 눈을 맞추어주고 있었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은찬의 입이 벌어지려는 순간, 가람은 은찬의 말을 막아섰다.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해가 길어져 어둑해 지려는 찰나 단 둘 뿐인 도서관. 선생님,하고 막아선 가람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그런 가람의 말에도 다정하게 왜 그러냐 묻는 은찬 덕에 가람은 마른 침을 삼켰다.
"저…, 금요일날, 차…에서 말인데요"
"아, 네. 왜요?"
"제가 너무 횡설수설한 것 같아서…."
"응, 그래서요?"
"그래서 제가 생각을…, 아니 대답을, 저, 그러니까…."
가람은 다시 한 번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겨우 다시 얻은 기회인데. 머릿속은 엉망진창으로 엉켜 연습했던 말은커녕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은찬의 눈은 여전히 다정하게 가람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머리 위에 올라와 있던 손은 어느새 내려가 기대고 있는 은찬을 받치고 있었다. 따뜻했던 은찬의 손이 사라지고 머리가 점차 식어갔으나 입을 땐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가람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멍한 머리로 그러니까,라는 단어만 반복하며 마른 침을 꼴딱꼴딱 삼키던 가람은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우리 사귀는 거 맞죠!"
아…, 망했어. 결국 자신이 연습하던 말과는 아주 거리가 먼 말을 내 뱉은 가람은 절망했다. 그렇게 연습했는데. 어느새 꽉 쥐고 있던 주먹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다. 가람의 머릿속엔 만회는커녕 웃지나 않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꽉 감았던 눈을 조금씩 뜨며 가람은 은찬의 얼굴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겨우 웃음을 참고 있던 은찬은 가람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연락도 하지 말라더니. 주말 내내 고민한 게 그거였어요?"
가람은 대꾸할 수 없었다. 그저 쥐구멍이라도 없는지 눈을 굴리기에 바쁠 뿐이었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라 차마 은찬과 눈을 마주칠 수도 없었다. 이럴 거면 주말 내내 고민한 보람이 없잖아! 속으로 외쳐보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나직하게 웃는 은찬의 웃음소리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은찬이 가람을 불러왔다.
"가람씨, 나 좀 봐요"
"왜, 왜요…."
"이거면, 답이 됐어요?"
말과 동시에 은찬이 가람의 손을 잡아 왔다. 머리에, 어깨에만 닿았던 따뜻한 온기는 가람의 손 안에 온전히 모여들고 있었다. 빤히 손을 바라보는 가람에 은찬은 손을 꽉 쥐었다가 가람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맞추어 깍지를 꼈다. 처음부터 은찬을 위해 만들어진 양, 가람의 손은 은찬의 손에 딱 맞춘 듯 잡혀 들어갔다. 잡아준 손에서 전해지는 온도가 가람에게 스몄다. 스민 온도는 천천히 몸을 달궈 심장소리를 키워 나갔다. 심장소리를 타고 온 몸으로 전해지는 설렘이 가람의 몸을 모두 돌고 다시 은찬에게로 전해졌다.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간, 도서관에서. 가람은 새빨개진 얼굴로 은찬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것을 보며 은찬은 그저 웃었다. 꽉 잡은 두 손을 바라보는 가람의 눈이, 수줍게 달아오른 양 뺨이, 꽉 마주한 그 손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럽다고 은찬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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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야기는 해피엔딩.
일 줄 알았건만. 가람은 머지않아 새로운 고민에 봉착했다. 하늘색 가는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고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나가던 가람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고민했다. 목 부근의 마지막 단추를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남들이 보면 우습게 여길 고민일지도 몰랐으나 가람에겐 그 무엇보다도 심각한 고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겨우 두 달이 되어 가는 애인은 스킨십이 진해도 너무 진했다. 그래, 사귀기 전부터 그렇게 어깨에 손을 올리고 머리를 쓰다듬더니. 가람은 마치 제 앞에 은찬이라도 있는 듯이 거울을 노려보았다. 그저 다정한 사람인 줄만 알았던 제 애인은 그다지도 능글거리는 남자였고 이제 여름이 다가와 옷이 얇아지고, 짧아질수록 몸과 몸이 닿는 횟수는 늘어만 갔다. 처음 반소매를 입고 간 며칠 전만 해도, 은찬은 유난히 곁에서 어물대기를 반복하더니 기어코 열심히 책을 정리하고 있는 가람의 곁으로 바짝 붙어선 책장으로 뻗은 손목을 부여잡고 팔뚝에 입맞추었었다. 두어 사람들이 도서열람실을 둘러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입을 대어 오는 대담한 행동에 가람은 소리를 지를 뻔 했으나 그것을 어떻게 알아챘는지 손 전체로 가람의 입을 막고는 그 위에 검지손가락을 세워 올렸다.
'쉿. 도서관에서 떠들면 혼나요.'
그리곤, 웃었다. 웃지 라도 않았으면 정강이라도 걷어차 주었을 텐데. 웃기는 또 어찌나 가슴이 떨리게 웃던지, 입에 일자로 딱 붙은 검지는 그저 평범한 손가락과 다를 게 없었는데도 괜히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얄미운데도 좋아서, 가람은 그저 은찬을 노려만 보다 품 안에 있던 책들을 마저 정리했다. 그것뿐이었으면 가람은 거울 앞에서 이런 고민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평소보다 목이 조금 더 드러난 옷을 입고 간 날은 사무실 안에서 목에 뽀뽀도 당했었다. 둘이 있는 틈이 나면 손을 잡아오고 가끔은 껴안기도 했다. 가람이 말을 할 거리를 던져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을까 싶을만큼 은찬은 가람과 닿는 것을 좋아했다.
"…잠궈야겠다."
얼마 전 은찬이 목에 입을 맞추었던 것까지 떠올리니 목 언저리가 화끈거려 가람은 마지막 단추를 굳게 잠그곤 집을 나섰다. 장소가 어디든 손부터 뻗어오는 은찬이 보통인 것인지 아닌 것인지 도통 분간이 가지 않았다. 모두가 그렇게 하는데 가람 혼자 그렇지 못한 것이라면 노력해야 할 일이겠지만, 가람의 눈엔 은찬이 유독 특별나 보였다. 서슴없이 스킨십을 하는 것도 신기했지만 남들의 눈을 신경쓰지 않는 다는 점도 한 몫을 했다. 아니, 어떻게 사람들 있는데서 그럴 생각을 해? 가람은 걷는 내내 진지한 얼굴로 고민을 해 봤지만 이유라고 꼽을 것 같으면 은찬이 어떤 스킨십을 해 와도 당황하여 그대로 넘어가준 것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래, 그게 문제였어. 가람은 얕게 인상을 쓰며 오늘부터는 절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주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가람씨."
"네, 그러네요."
가람은 은찬에게 인사를 건네곤 그가 곁으로 와 앉으려는 순간 보란 듯이 일어나 반납된 책이 꽂혀있는 북트럭을 끌었다. 둘이 가까워진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노골적으로 그의 손길을 막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가람의 행동에 은찬은 그를 바라보았지만 가람은 얼굴조차 마주해 주지 않고 열람실로 자리를 옮겼다. 멍하니 자리에 남은 은찬은 가람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눈을 두어번 깜빡이곤 허탈하게 웃었다.
그 후로도 가람의 '은찬 피하기'는 계속 되었다. 은찬이 근처에만 와도 뽈뽈뽈 사라지는 가람은 은찬의 눈에 마냥 귀여웠지만, 정작 피해 다니는 가람은 은찬이 어디에 있는지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죽을 맛이었다. 자신이 도망 다니는 것을 즐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은찬은 가람이 한발자국 멀어지면 두발자국 다가와 얼쩡대었다. 왠지 자신이 골탕을 먹는 것 같은 기분에 은찬을 몰래몰래 노려보았지만 그것도 잠시, 널널한 오전 시간이 지나니 책은 쌓여갔고 도서관에서 하고 있는 독서프로그램을 준비하려니 굳이 은찬을 피하지 않아도 바빠 마주할 시간도 없게 되었다.
"아, 몇 권 안 남았다."
퇴근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산더미처럼 쌓였던 반납 책들도 몇 권 남지 않았다. 절반을 나누어 은찬과 열심히 책을 정리해서인지 퇴근 시간 전엔 한 숨을 돌릴 시간도 남을 것 같았다. 남은 책을 한권, 한권 꽂아나가다 높이가 맞지 않는 책들의 틈 새로, 가람은 붉은 머리칼을 보았다. 책의 자리를 찾기 어려운 것인지 허리까지 반쯤 굽혀 책의 번호와 책장에 꽂힌 책들을 번갈아 보는 은찬의 모습은 왜인지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에서 은찬을 본 것이 참 오랜만이라고, 가람은 생각했다. 책 틈새로 보이는 은찬은 그 얼굴이 온전히 보일 듯 보이지 않아 애가 탔다. 금방이라도 그 얼굴이 저를 보고 웃어줄 것만 같았지만 여전히 책에 몰두하고 있는 표정은 먼저 다가가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람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가람은 품에 안고 있던 책 한권을 제 자리에 끼워 넣고 본격적으로 은찬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마음 것 볼 수 있었으나 한 책장을 건너 숨을 죽이며 몰래 바라보는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기분이었다.
빨간 머리칼과 진지한 눈, 잘 빠져나간 코, 늘 입에 먼저 시선이 가게 하는 보일듯 보이지 않는 점 그리고 그 아래를 매끈하게 지나가는 턱 선에, 목 아래로 널널해지는 옷 틈까지. 가람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고 그 순간 그 작은 책 틈 사이로 은찬과 눈이 마주쳤다.
앗!
하는 새에 몸을 틀어 책장을 등진 가람은 정말 물건을 훔쳐보다 걸린 아이처럼 두근대는 가슴을 멈출 수가 없었다. 품에 있는 책을 꽉 끌어안으며 은찬이 곁으로 올까 숨마저 멈추었다.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 퇴근 시간은 물론 퇴근 후에, 주말에, 늘 보던 얼굴인데도 이상할 만큼 쿵쾅대는 가슴에 가람은 그저 눈을 꽉 감고 고개를 흔들어댈 뿐이었다.
"뭐에요? 하루 종일 피하더니 그렇게 몰래 쳐다보기나 하고."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건만 바로 제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가람은 놀라 숨을 집어먹었다. 그와 동시에 놀라 커진 눈에는 책장에 한 손을 올린 채로 가람에게 몸을 기울인 은찬이 오롯이 비추었다. 뚫어질듯 가람을 내려다보는 은찬에 가람은 품 안의 책을 바짝 안으며 눈을 피했으나 그 공간만큼 밀착해 오는 은찬에 은찬을 올려다보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하, 하하, 제가 그랬던 가요."
"응. 그랬어요. 그래서 종일 보고 싶었는데"
문을 닫을 시간이 가까워진 조용한 도서관, 소리가 울릴까 나직히 말을 뱉어내는 은찬은 잔뜩 얼어붙은 가람이 마냥 귀여운 것인지 짓궂은 표정을 하곤 가람의 귓가에 속삭여댔다. 귓가에 숨이 불어넣어질 때마다 가람은 움찔댔다. 지나치게 간질거리는 은찬의 목소리가 너무도 가까이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너무 잘나서, 굳이 그렇게 집어내지 않아도 너무 놀라서 콩닥거리는 가슴은 은찬이 한마디를 꺼낼수록 더 거세게 뛰어댔다.
"그…, 저, 너무 가까, 운, 데…."
"그래서요?"
말을 꺼낼수록 더 몸을 붙여오는 은찬에 가람은 눈앞이 아찔했다. 여기서 이렇게 붙어서 뭘 어쩌겠다고! 된다면 소리라도 치고 싶을 만큼 가까워서 가람은 애써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온 몸을 울리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은찬에게 전해질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아니, 이미 들렸을 것이란 생각에 가람은 당장이라도 은찬을 밀쳐내고 은찬에게서 떨어지고 싶었다. 목언저리는 물론 얼굴까지 열이 올라 홧홧한데 애써 무시하고 있는 시선은 다른 곳을 보고 있어도 가람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조금만 비켜 주시면…."
은찬을 밀어내며 그제 서야 은찬과 눈을 마주친 가람은 밀어내던 손마저 멈춘 채로 멍하니 은찬을 바라보았다. 반쯤 내리깔고 가람을 바라보는 은찬의 눈은 온전히 가람에 대한 애정으로 잔뜩 젖어 있었다. 지겹도록 보는 얼굴에, 늘 보는 웃음이었지만 가람은 또 마음 한 구석이 간질거려오기 시작했다. 자신을 보고 나른하게 웃는 그 얼굴이 그렇게 안심이 되면서도 그 눈이 지독히도 좋아 울컥, 괜히 울음이 날 것만 같았다. 늘, 이상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니까. 가람은 은찬과 눈을 맞추곤 모른 척 은찬의 장단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점점 가까워져오는 은찬에 가람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자, 잠깐만요!"
정말로, 살포시 눈을 감고 넘어가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눈을 감으려는 순간 보이는 CCTV는 은찬과 가람을 너무 적나라한 각도에서 찍어대고 있었다. 가람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처음부터 너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듯한 까만 카메라는 사랑에 폭 빠져있던 가람의 신경을 긁어대었다. 도서관 대부분의 업무를 맡고 있는 은찬과 가람이었으나 CCTV는 둘의 권한 밖에 있는 보안 시스템이었다. 지금 좋다고 평생직장에서 쫓겨날 수는 없지. 결국 가람은 슬며시 은찬의 목에 감으려 했던 손을 풀곤 은찬의 어깨를 밀어냈다.
"저기, 카메라 있잖아요."
혹시나 누구에게 들릴까 입을 벙긋거리며 말대꾸를 한 가람이었으나 돌아오는 은찬의 대답에 결국 두손두발을 다 들고 은찬의 두 목을 끌어안았다. 애초부터, 잘난 애인의 진한 스킨십은 고민거리가 되지도 않는 것이라는 생각 또한 들었다.
"네 달을 일했는데 아직도 몰라요? 사실 저거 안 켜져 있어요."
좋으면 그만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