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해가 서산너머로 내리기 시작하는 것을 바라보며 궁을 나갈 채비를 했다. 그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은 태양빛에 더 붉게 빛나는 자신의 주작궁이었으나 해가 저무는 시점부터 다시 타오를 때까지는 달밤에 더욱 은은하게 빛나는 청룡궁에서 밤을 보냈다. 거추장스러운 복식을 벗고 지상에서처럼 가벼운 수련복차림을 한 남자는 오늘도 자신의 정원으로 향했다. 여름을 상징하는 주작궁은 그 의미처럼 늘 해가 찬란하게 빛났다. 특히나 그가 아끼는 그의 정원은 푸른 녹음 사이에서 붉디 붉게 빛나는 장미의 정원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남자는 늘 그랬던 것처럼 정원에서 자신의 머리색처럼 붉은 장미꽃을 한아름 꺾어 안아들곤 동향의 청룡궁으로 향했다.

 

 

 

"주작님 오셨습니까"

 

"휘는?"

 

"휘아님은…."

 

"아빠!"

 

 

 

 태양빛에도 푸른 기와가 은은하게 비추는 청룡궁은 늘 그렇듯 은찬을 맞이했다. 여럿의 시종이 줄에 줄을 이어 그의 앞에 서 머리를 조아렸지만 은찬은 그저 그들 너머로 다른 이를 우선 찾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찾을 때 마다 품 안의 붉은 장미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향을 내뿜었다. 시종 중 하나가 그가 찾는 이에 대해 운을 띄우기도 전에 주작궁의 온 마루가 작은 발소리로 가득 차며 작은 아이가 얼굴을 내비췄다. 댓살이 겨우 된 듯 한 아이는 도도도도 하는 가쁘고 어린 소리를 내며 은찬에게로 달려왔다. 품 안의 줄기가 혹여 아이에게 상처를 입힐까 주위의 시종에게 꽃다발을 맡긴 은찬은 달려오는 아이를 한 품에 안아 올렸다.

 

 

 

"응, 오늘도 잘 있었어? 오늘은 우리 휘가 보고 싶어서 조금 일찍 왔어"

 

"휘도 아빠 보고 싶었어!"

 

 

 

 아이는 은찬의 목을 좀 더 꽉 끌어안으며 가까이 밀착했다. 아이의 갈색빛 머리칼이 은찬의 턱을 간질였고 은찬은 그것을 보며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는 종일 이 순간만을 기다린 것 마냥 은찬에게 매달려 부벼대었다. 그저 웃으며 머리를 쓸어주니 휘의 선홍빛 눈이 은찬을 마주했다. 은찬은 한참이고 그 눈을 내려다보았고 그 모습에서 누군가를 떠올린 듯 기분 좋게 휘어진 눈으로 휘를 데리고 밖을 나섰다.

 

 주작궁이 여름을 상징한다면, 청룡궁은 봄이었다. 계절이 시작하는 시기인 만큼 청룡궁은 그 주인의 힘이 미약하여도 늘 만개한 봄의 날씨인 채였다. 짙푸른 녹음이 아닌, 수줍게 싹을 틔우는 연둣빛 잎들과 봄의 수줍음을 닮은 연하고 여린 꽃들은 석양에 비칠 때면 얼굴을 붉히던 그 주인과 닮아 있었다. 부끄러워 좋아한단 말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제 곁의 청룡. 은찬은 그를 떠올리며 아이를 조금 더 바짝 끌어안았다. 어느 곳이던 날이 좋은 청룡지에서도 두 남자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너른 들이었다. 늘 얕게 자라있는 잔디는 그 어느곳 보다도 푹신했고 그의 손길처럼 간질거리는 바람이 수도 없이 부는 곳. 은찬은 그 중앙의 커다란 나무 아래로 천천히 걸어가며 주변을 눈에 담았다. 언제와도 변함이 없는 곳. 은찬은 그 곳에서 함께 누워 잠을 청하던 언젠가를 떠올렸다. 그리도 행복했던, 어린 날. 몸은 언제나 같은 모습을 유지하겠지만 그 날은 다시 올 수 없음을 역겁의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된 만큼 은찬은 추억 속에 자리한 둘의 모습이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아빠-. 근데…."

 

"응, 휘아야"

 

"아빠는 왜 맨날 꽃을 가져 오는 거야?"

 

 

 

 목에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은찬의 목덜미를 간지럽혀 대던 휘가 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붉은 눈동자를 바라볼 때 마다 자꾸만 누군가가 생각이 나서, 은찬은 그저 웃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를 닮아 예쁜 아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은 자신이 평생을 가슴에 담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은찬은 꼭 그에게 말하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더 밝게 웃어주며 대답했다.

 

 

 

"좋아할테니까. 좋다고 말은 못해도 속으론 좋아할 사람이거든."

 

 

 

 그 말을 들은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찬이 말해주는 것의 반은 알아들었을까 싶었지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흰 들꽃이 만발한 곳을 가리키며 은찬의 옷자락을 붙잡아 끌었다.

 

 

 

"아빠! 저기 꽃!"

 

"응, 꽃이 잔뜩 피었네?"

 

"나도 엄마한테 꽃 줄거야"

 

 

 

 외모는 청룡을 쏙 빼다박았지만 성격은 은찬을 닮은 것인지 매사에 겁이 많아 은찬의 품이 아니면 청룡궁 밖을 벗어나지도 않는 아이가 은찬을 세워 꽃들 사이로 달려나갔다. 은찬은 제 품을 빠르게 빠져나가는 아이를 따라 꽃이 만발한 속을 헤집었다. 은찬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아이가 벌써 저만큼이나 컸어, 은찬은 휘를 보며 빈 허공에 읊조렸다. 아이 키의 반쯤 될까 싶은 작은 꽃들이 아이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휘는 꽃들의 속에서 제 손톱만한 작은 들꽃들을 꺾어나갔다. 가는 꽃들이 모이고 모여 은찬이 가져오던 꽃다발의 크기만큼 커지자 아이는 한아름 안고있는 다발을 들고 웃으며 은찬에게로 달려왔다.

 

 

 

"엄마 선물이야!"

 

 

 

 그에 은찬은 웃으며 대답했다. 응, 엄마가 좋아하겠다. 아이는 웃으며 다시 은찬에게 안기려 보챘고 은찬은 아이를 다시 안아올리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벌써, 엄마생각 할 줄도 아네."

 

"응, 맨날 아빠가 두는 그 꽃병에 꽂아 둘거야"

 

 

 

 은찬은 그 말에 그저 아이를 소중히 안고는 청룡궁으로 향했다. 좋아해 줄까? 아이가 너를 위해 처음 가져다주는 선물을. 은찬은 걸음을 바삐했다.

 

 

 

 

 

-

 

 

 

 

 

 청룡궁에 다다랐을 때, 아이는 서둘러 은찬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은찬은 평소와 다른 휘의 반응에 놀라 떨어지려는 아이를 단단히 고쳐 안았고 아이는 내려달라는 소리만을 반복하다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흡, 하고 놀라 숨을 마신 것 같기도 했다. 그에 은찬이 고개를 돌렸을 때, 또 하나의 목소리와 함께 푸른 머리칼을 휘날리는 가람이 삐딱하게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

 

"주은찬! 애 자꾸 안고 다니지 말랬지"

 

"아냐, 휘 이제 내려갈거야, 응, 내려가!"

 

"니가 맨날 안고 다니니까 애가 자기 발로는 한발자국도 안 움직이려고 하잖아"

 

 

 

 가람은 얕게 인상을 쓰며 다가와 은찬의 품에 안겨있는 휘를 내려두었다. 휘보다 좀 더 어린 듯 한 아이는 은찬을 보자마자 신이나 은찬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고 은찬은 멋쩍게 웃으며 가람을 바라보았다.

 

 

 

"화내면 애기한테 안 좋아"

 

"뭐. 애 한 두 번 품어 본 것도 아니고. 이정도는 해줘야 애가 적당히 순해"

 

 

 

 은찬은 가람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가람의 배로 손을 가져다대며 웃었다. 배가 조금씩 불러오기 시작한 후로는 정복을 입지 않은 덕에 수련복 아래로 바로 느껴지는 배는 체온이 높은 은찬의 손과 온도가 딱 맞았다. 아빠가 하루 종일 보고 싶었어요, 우리 아가. 은찬이 배를 살살 문지르며 얘길 꺼내자 가람은 그저 눈을 흘겼다. 하여튼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능글맞아져요. 투덜대며 무어라 얘기를 더 꺼내려는데 둘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휘가 가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흔들어대었다.

 

 

 

"엄마, 엄마. 이거…."

 

"…이게 뭐야?"

 

 

 

 가람은 건네지는 하얀 들꽃 다발을 받아들며 되물었다. 선물이야! 하며 환히 웃는 아이는 멍한 가람의 표정을 살피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거 맞나? 아빠가 좋아할 거라고 했는데. 아이는 입술 끝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가람이 반응하길 기다렸다. 가람은 꽃다발과 아이의 얼굴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더니 발개진 눈을 하곤 자세를 낮추어 휘를 끌어안았다. 나도! 나도! 하고 은찬에게 매달려 있는 아이가 가람에게 달라들었다. 가람은 그렇게 두 아이를 한참이나 끌어안고 있었고 은찬은 가람의 얼굴아래 땅이 젖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고마워, 고마워, 아가. 엄마, 너무 기분 좋다."

 

 

 

 

 

-

 

 

 

"많이 컸지?"

 

 

 

 은찬이 붉은 장미꽃과 하얀 들꽃을 꽃병에 정리하며 가람에게 물었다. 겨우 두 아이를 재우고 자신의 침실로 돌아온 가람은 은찬의 등을 끌어안은 채였다. 가람은 대답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은찬은 자신의 배쪽으로 둘러진 가람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보들한 손등을 쓸어주었다. 가람이 고개를 묻고 있는 등언저리가 뜨거웠다. 은찬은 몸을 돌려 가람을 끌어안아 주었다. 이러다 얼굴 붓겠네. 두 뺨을 감싸 여전히 발간 눈가를 닦아내 주며 은찬은 말했다. 이번엔 딸일까? 애기 엄마가 너무 감성적인 것 같아. 그런 은찬의 말에 가람은 찡한 코끝을 애써 무시하며 은찬을 쏘아보았다.

 

 

 

"그렇게 봐도 사랑스러운 걸"

 

"시끄러. 입만 살아선"

 

"근데, 딸이었으면 좋겠다. 가람이 너랑 똑 닮은"

 

 

 

 아마, 우리집 최고의 공주님이 되지 않을까? 나중에 시집은 어떻게 보내지? 그냥 평생 우리가 데리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널 닮은 사랑스런 여자아이라면. 가람을 보던 눈을 굴리며 은찬이 말했다. 가람은 한마디만 덧붙일뿐이었다.

 

 

 

"하여튼, 김칫국부터 마시긴. 애가 다 듣는다, 너"

 

"뭐, 막내 왕자님이라도 행복하겠지만."

 

 

 

 은찬은 가람의 눈가에 입맞춰 주곤 가람을 껴안고 뒤뚱뒤뚱 침대로 향했다. 가람을 침대에 뉘이고, 옷을 편하게 정리해준 후 자신도 그 곁에 누웠다. 바로 머리에 손을 괴곤 가람을 바라보며 배를 쓸어댔지만 가람은 그저 은찬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을 뿐이었다.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며 가람은 조근조근 이야기를 꺼냈다.

 

 

 

"나 있잖아"

 

"응"

 

"솔직히 너랑 처음 만났을 때도 아니, 니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도 이렇게까지 행복해질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난 늘 이 순간을 그려왔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너랑, 너와 함께할 우리 애기들이랑 언제나 이렇게 행복하기만 할 순간을, 늘 상상해왔었어"

 

"진짜?"

 

 

 

 가람은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은찬을 바라봤다. 뭐야, 그런 상상해온 거였으면 나한테 말해주면 좋잖아. 그럼 상상만으로도 행복했을 텐데. 조금 투정이 섞인 말투에 은찬은 웃었다. 원래, 선물은 모르고 받아야 더 놀랍고 행복한거잖아. 은찬이 가람의 귓가에 속삭여주며 가람의 배를 둥글게 쓸었다. 가람을, 그리고 가람의 배를 바라보는 은찬의 눈은 고요하고, 다정했다.

 

 

 

"아가, 엄마 고생시키지 말고 건강히 나와서 아빠랑, 엄마랑 오빠나 형아랑 같이 다 행복하자?"

 

 

 

 그에 가람은 또 새침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은찬에게 대꾸하려다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런 가람의 행동에 은찬 또한 쓸던 배를 멈추며 놀라 동그래진 가람의 눈을 바라보았다. 은찬의 손 아래에서 가람의 심장소리가 아닌, 다른 둔탁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가람은 자신을 바라보는 은찬의 눈을 보며 두어번 깜빡였다. 이것은 두 번의 출산을 겪은 부부에겐 익숙하면서도 늘 새로운 움직임이었다.

 

 

 

"방금, 느꼈지?"

 

 

 

 동시에 내뱉은 말에 둘은 눈을 마주하며 웃었다. 행복은, 늘 함께 온다.

 

그리고 그 행복은 늘 눈이 부시도록 빛이 난다.

 

 

 

 

 

 

 

 

*

 

벌써 30일이 되었네요.

이제 하루만 더 있으면 정말정말 좋아했던 두 아이들이 가요. 늘 행복하겠지만, 끝의 끝에서도 행복하길 바라면서..

너희는 애 셋 낳고 꼭 행복해야해ㅠㅠㅠㅠㅠㅠㅠ

은찬아 가람아! 너희 때문에 정말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했어. 이 글을 볼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행복해야해! 고마웠어!

 

덧붙이자면 휘는 그냥 아명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빛날 휘.

휘아는 빛나는 아이라는 뜻에서 시종들이나 직위가 낮은 사람들이 휘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라고 혼자 설정한..ㅎㅎ..ㅎ

나머지 자잘한 설정들은 스루합니다

아 그리고 찬가람네 막내는 절대적으로 딸입니다. 아들-아들-딸이어야 해요. 꼭!

둥굴레차!/은찬가람 | Posted by 윤새벽 2015. 1. 27. 21:01

[은찬가람/찬가람] For a long time

 네가 들어온다. 나는 발걸음으로도 네가 온 것을 알 수 있으나 모른 체 한다. 너는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고 난 여전히 너와 눈을 마주하지 않는다. 넌 널 바라보지 않는 내 턱을 우악스럽게 붙들고 턱 아래가 아리도록 고갤 움직여 입맞춰온다. 뻔하다. 너는 늘 내 생각머리 안에 있다.

 

 

 

"나 이제 한계에요"

 

 

 

 

 

For a long time

 

 

 

 

 

 

 

 

"친하게 지내렴. 옆집으로 이사 온 동생이래. 형아랑 친하게 지내, 은찬아"

 

 

 

 너와 나의 첫 만남은 그저 흔하디흔한 날들 중 하루였다. 고등학교까지는 가지 않아야겠냐는 눈물 어린 엄마의 부탁에 억지로 학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집에는 이삿짐 정리가 한창이라는 이유로 우리 집에서 잠시 놀고 있던 네가 있었다. 한 대 쥐어박으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울망울망한 눈망울로 내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던 너. 나는 그런 너에게 눈꼽만큼의 관심도 가지지 않은 채로 방으로 들어갔고 너는 문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 눈알이 하나 빠진 토끼인형을 들고 동그란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별로 특별하지 않은 기억. 그러나 너에게 그것은 시작이었다고, 어느 날의 너는 말했었다.

 

형아, 나랑 놀아주면 안 돼?

 

형, 오늘은 형네 집에서 자고 갈래.

 

형, 나 형네 회사 근처에 있는 대학 붙었어요. 자주 놀러갈게요.

 

형, 오늘부터 우리 같은 회사 사람이에요.

 

 우습게도, 쌩한 바람이 불던 첫 만남과는 다르게 우리는 꽤 가까운 사이로 자랐다. 4살이라는 나이차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한 번도 학교를 함께한 적은 없었으나 늘 비슷한 물리적 거리를 유지하며 친형제처럼 지내왔다. 너는 나를 유독 잘 따랐고 나는 너를 진심으로 아꼈다. 크면 꼭 나와 결혼하겠다는 어린 시절, 힘든 일이 있다면 곧장 달려와 위로를 받고 돌아가던 학창시절, 나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라는 대학시절을 보내며 너는 결국 나와 같은 회사에까지 다니게 되었다. 나는 그런 네가 대견스러웠고 같은 부서에서까지 일하게 된 널 보며 아주 많이 기뻐했었다.

 

 

 

"청대리, 내일 저녁 시간 되나"

 

"내일 저녁이요? 저녁을 같이 먹을 사람이 있긴 한데…, 미루죠 뭐. 대신 비싼 거 사주셔야 돼요"

 

"뭐, 니가 원한다면야"

 

 

 

 기뻐했었다.

 

 같은 부서에서 일하게 된 이후로 너는 유독 나를 더 쫓았다. 서로 지내는 곳은 조금 거리가 있었으나 늘 함께 출근을 했고 함께 퇴근을 했다. 매일 함께 식사를 하고 다른 이와 약속을 잡으려 하면 어느새 뒤로 바싹 다가와 저도 끼면 안 되겠냐며 그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처음엔 그저 처음 하는 사회생활에 기댈 곳이 나 뿐이어 그렇겠지,하고 넘겼었으나 사내에서 마저 노골적으로 따라붙는 눈길에 나는 그 묘한 이질감을 모른 체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동기들과 함께 할 때, 의지하는 상사의 곁에 있을 때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로 내 곁의 이들을 바라보는 그 눈빛은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고 슬쩍슬쩍 다가와 어리광을 가장해 부리는 투정은 단순히 친하다는 표현 이상의 스킨십이었다.

 

 

 

"그럼, 내일 저녁에 뵈요"

 

 

 

 그 묘함을 느끼고 난 후 나는 꽤나 고의적으로 너를 피했고 네가 없다고 판단되는 곳에서만 다른 이들을 만났다. 출근시간도, 퇴근시간도, 밥을 먹거나 다른 이들과 부딪힐 만한 시간이면 너를 교묘히 따돌려 혼자 생활했다. 어려서부터 늘 함께하다시피 한 버릇이 잘못 들어 생긴 집착이라면 교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내가 노골적으로 너를 피해 다녀도 넌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다른 이에게 따라붙던 시선이 내게 붙은 것을 제외하곤. 그 시선은 안타까움인 것도 같았고 슬픔인 것도 같았으며 조심스러움인 듯도 했다. 어찌되었든 나는 그렇게 너와 거리를 점점 벌려내 갔고 그것은 크게 힘들거나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뭐 잘못한 것이 있나요?"

 

 

 

 전적으로, 나에게만.

 

 

 

"왜 자꾸 피해요. 그러지 말아요. 난 그저 형이랑 가까이 있고 싶은 것뿐이에요"

 

"넌 잘못한 거 없어"

 

 

 

 잘못한 게 있다면 네가 그렇게 나에게 집착하도록 내버려 둔 것뿐이겠지. 나는 전처럼 너에게 나의 모든 생각을 털어놓지 않았고 너는 그것에 어떠한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런 널 바라보던 나는 너를 두고 밖을 나섰고 너는 나를 뒤따라오지 않았다. 뒤에서 무어라 중얼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했다. 단 순간에 사그라들 기묘한 감정이라면 일찍이 잘라내는 것이 필요할테니까. 그렇게 모든 것은 순조로운 듯 했고 나는 아주 오래간만에 네가 아닌 다른 이를 만났다. 함께 저녁을 먹고 웃고 떠들며 그의 차에 타 대로변을 달리다 그의 집으로 향했다. 딱히 거부감은 없었다. 그의 집 아래 주차장, 멈춘 차 안에서 나는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다가 차에서 내렸고 눈 앞이 번쩍임과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난 분명 경고했어요"

 

 

 

 꿈과 현실의 경계 즈음에서 지겹도록 익숙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너를 간과했구나.

 

 

 

-

 

 

 

 눈은 생각보다 쉽게 뜨였다. 다만, 눈 뜬 세계가 어두웠을 뿐이지. 아무리 눈을 굴려보아도 조그만 빛줄기 하나 눈 앞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눈을 뜬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수십번 들었다. 시야가 사라진 공포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했고 눈 주위가 부자연스럽게 조이는 느낌을 느끼고 나서야 눈 앞이 무엇인가로 가려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떠오르는 단편적인 기억에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현재의 내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이 공간이 어떤 곳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으나 등을 바로 댄 곳이 푹신거리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침대 위에 팔이 묶인 채 기절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깼어요?"

 

 

 

 상태를 자각하니 몰아치는 불편함에 바르작 댄 것을 알아챈 것인지 가까이에서 네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순간 숨을 내쉬는 것마저 잊었고 그런 나를 보며 너는 낮게 웃었다. 옆구리 부근이 푹 가라앉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네 손이 내 뺨에 닿았고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가려진 눈이었지만 네가 날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지 선명하게 그려졌다. 상냥한 체 하는 미소를 걸치곤 살짝 내리깐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소중한 것을 다루기라도 하는 듯 살살 쓸어대는 뺨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끼며 나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내 손을 피하고 싶어요?"

 

"……."

 

"대답해"

 

 

 

 언제 가까이 다가온 것인지 말을 토할 때 마다 뱉어지는 숨이 바로 곁에서 느껴졌다. 나는 그 소름끼치는 감각에 몸을 잘게 떨었고 넌 그 새를 참지 못하고 귓가를 잘근거리며 씹어대었다. 나는 그런 네 행동에 온 몸이 벌벌 떨렸다. 천천히, 그러나 배려는 없는 정도의 세기로 너는 내 귓가를 짓씹었다. 아무리 이를 악물고 참아내어도 이가 귀 끝에 박힐 때 마다 소리가 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꽉 쥔 주먹이 덜덜 떨릴 때쯤이야 네가 귓가를 씹던 입을 때고 속삭였다.

 

 

 

"내 말이 우습지? 아님, 아직도 모른다고 잡아 땔 거야?"

 

"너…, 나한테 왜이래"

 

"아직도 그러네. 그럼 확실히 가르쳐 줄게."

 

 

 

 너는 코웃음을 치며 내 위로 올라탔다. 나는 묶인 손으로나마 널 밀어내려 보이지 않는 눈 앞을 마구 내려치고 발버둥을 쳐댔으나 두어번 손짓을 하자마자 네 손에 묶인 손목이 틀어올려져 움직일 수 조차 없게 되었으며 발버둥 대는 다리는 허리에 올라와 앉은 너에 널 떨어뜨려 놓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네 앞에서 씩씩대며 분을 삭였고 너는 그런 날 가만히 두더니 한마디를 할 뿐이었다. 이제 끝이에요? 나는 그에 팔에 다시 힘을 주었으나 곧바로 목을 죄어오는 손에 뱉어내려던 숨은 다시 목 뒤로 넘어갔다. 목의 양 옆을 누르며 내게 가까이 다가온 너는 스치는 코가 닿을 정도로 다가와 있었다. 나는 놀라 숨을 들이쉬었지만 네 손아래 반쯤 막힌 기도에 색색대며 넘어가는 공기는 충분한 숨을 쉬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머리에 피가 잔뜩 몰리는 느낌에 더는 어두워질 수도 없는 눈앞이 더욱 내려앉는 환상을 보았다. 녀석의 손아래에 놓인 두 맥이 막힌 길 앞에서 펄떡펄떡 뛰어댔으나 조금의 양보도 없는 손아귀 힘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져가는 중에도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머리에 발버둥을 쳤다. 움직이지 않는 팔에 가득 힘을 주어 몸을 비틀고 네게 닿지 않는 다리를 침대로 마구 내리 꽂았다. 죽음이 온 몸에 스미는 기분이었다.

 

 

 

"어때, 죽을 것 같아? 숨은 쉬어지는데도 미칠 것 같지. 난 니 앞에서 늘 이래"

 

"윽…, 으븝, 놔, 놔줘, 학, 주은찬…!"

 

"다른 새끼랑 노닥거릴 니 생각만 하면 꼭지가 돌아서 이렇게 앞에 보이는 게 없어"

 

 

 

 너에게 내뱉는 내 목소리는 거친 숨소리와 섞여 곧 죽음을 앞둔 사람의 것 같았다. 더욱더 강하게 눌러오는 네 손아래에서 나는 더 거세게 발버둥을 쳐댔고 두개골을 조여오는 듯 한 느낌에 나는 두 주먹을 억세게 쥐었다. 죽는다, 죽을 것이다. 불과 몇 초 안에 나는 죽는다. 터져나갈 듯 한 감각 새로 드는 생각은 그것뿐이었고 벌어져 숨을 잔뜩 들이마시는 입이 막아지자 나는 온 몸에 힘을 풀고 너를 받아들였다. 입안으로 밀려들어오는 혀에 나는 그것이라도 부여잡고 살려달라 발악을 해댔다. 여전히 붙잡혀 있는 두 팔을 내려 네 목을 끌어안고 조금이라도 더 널 빨아들이고 끌어당겨 네 입안의 공기를 모두 머금었다. 피가 돌지 않아 저릿저릿한 혀 끝이 너와 닿을 때 마다 온 몸에 전율이 올랐다. 하지만 나는 그것으로도 부족했다.

 

 

 

"이렇게 나만 보면 좀 좋아. 앞으로도 이렇게 나한테만 매달려요."

 

 

 

 너는 그런 날 비웃으며 입을 떼었고 죽음의 문 앞에까지 데려다 준 손을 떼었다. 학, 하는 소리와 함께 몸 안으로 밀려든 공기는 코 앞에서 몰린 피가 몸의 구석구석을 돎과 동시에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의식이 하나하나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툭, 툭, 툭. 해방된 손 아래에서 점차적으로 사그라드는 괴로움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감각과 매우 닮아있는 것이었다. 너는 손을 뻗어 내 눈을 가리던 것을 풀어주었고 칠흑같은 어둠 위로 순간 쏟아져 내리는 형광등의 빛에 나는 가쁘게 숨을 내쉬며 눈을 꽉 내리 감았다 서서히 떴다. 눈이 아프도록 비추는 불빛을 뒤로 내 위에 선 네 모습을 보며 나는 온 몸이 아릿한 쾌감을 느꼈다.

 

 

 

"사랑해요. 부디 나를 자극하지 말아요. 죽여버리기 전에."

 

 

 

 나는 그 말을 뒤로 다시 눈을 감았다. 온전히 힘이 풀린 탓이었다. 전신이 저릿한 이 감각은 너무도 오랜만의 것이었다. 누군가 내게 절절히 매달려 사랑을 갈구할 때의 우월감, 그리고 그 사이로 피어오르는 쾌감. 그것은 어설픈 감정을 가진 이가 절대로 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오랜 시간 너를 쥐고, 흔들고, 달래며 원하는 집착을 얻었다. 물론 넌 몰라야 할 일이지만. 널 그렇게 몰아세우는데 아주 많은 시간을 쏟은 것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아, 앞으로도 날 이렇게 필사적으로 사랑해줘. 나에게 이렇게 매달려줘. 집착해줘. 나는 필사적으로 너에게서 멀어지며 네 사랑을 시험할 테니.

 

 

 

 

 

 

 

 

*

 

가람이와 은찬이가 느꼈던 감각이 궁금하시다면 숨 참고 다시 읽어 보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둥굴레차!/etc | Posted by 윤새벽 2015. 1. 23. 16:20

[백청주] Midnight phone call

 

 

 


 물소리가 들린다. 이내 멈출 저 물소리는 한때는 내 이성을 시험하던 일종의 도구였다. 씻지 않고 내게 올 리가 없는 너지만 우리 집안에 들어서면 꼭 다시 씻던 넌, 내 시야에서 차단된 자신을 물소리와 함께 잔뜩 상상하며 애태워보란 듯이 항상 문을 완전히 닫아두지 않은 채 샤워를 했다. 힘 있게 바닥으로 내려치는 물소리와 몸을 타고 흐르다 타일로 씻겨 내려가는 물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나는 너 때문에 알게 되었다. 네가 사다두라고 닦달을 하던 바디워시 또한 사람의 살 냄새와 향이 섞이면 혀가 아릴정도로 단내가 난다는 것 또한, 모두 네가 가르쳐 준 것들이었다.

 

 난 그저 침대에 얼굴을 묻고는 눈을 꽉 감았다. 언제인가는, 그 화장실의 문틈새로 씻는 널 훔쳐본 적도 있었다. 네가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그 틈사이로 가늘게 보이는 그 매끈한 몸을 끈적한 시선으로 핥아낸 적도 있었다. 아직도, 그 날의 넌 이렇게 눈을 꽉 감아도 단숨에 그려낼 수 있었다. 성인남자치곤 어려보이는 몸과 작은 체구, 말라 툭, 불거져 나온 뒷목의 뼈에서부터 작고 동그란 엉덩이를 쓸어내리던 손, 네 주변을 감싸며 피어오르던 김들과, 하얗다 못해 붉은 빛이 도는 몸을 타고 내리던 수없는 물방울까지. 나는 여전히, 네 모습을 상상하면 숨이 턱턱 막혀오고 가슴이 뻐근해지곤 한다. 이것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소리가 멈추었다. 넌 왱왱대는 드라이기로 머리를 반쯤 말리곤, 내 곁으로 올 것이다. 나는 느긋하지 할 수 없지만 느긋한 척을 하며 침대헤드에 비스듬히 기대 널 기다리고, 넌 허리에 수건을 감고는 여전히 물기를 머금은 머리를 가볍게 털어대며 내게로 걸어올 것이다.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존재인 것 마냥 한쪽 입꼬리를 가볍게 올리곤 침대곁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런 네게 잔뜩 홀린 표정을 지은 난 네 팔목을 잡아당기고 넌 엉거주춤하게 한쪽 무릎을 침대 위로 올리곤 좀 전보다 더 야릇하게 웃으며 허리춤에 감겨있던 수건을 풀어 던지며 내 위에 올라탈 것이다. 늘 비슷한 패턴의 유혹, 그걸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는 나의 보챔. 그리고 이어지는, 섹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전처럼 마냥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내가 변한 것일까, 네가 변한 것일까.

 니가 내 위에 올라 나를 바짝 안고는 가쁜 템포로 허리를 놀렸던 어떤 날인가에, 나는 우연히 네게서 눈을 돌려 쉼 없이 반짝이는 네 핸드폰을 보았다. 휴대폰의 불빛은 이내 사라졌지만, 나는 이미 여러 통의 부재중전화가 쌓여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굴까, 누가 널 이렇게 찾는 것일까. 사실, 내가 네 첫 번째가 되지 못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저 사람도 나와 같이 너의 작은 부분이라도 나눠가지고 싶어 하는 어리고 어린 희생양인걸까. 개새끼,라고 저장되어있는 발신자는 그 뒤로도 서너통의 부재중 전화를 더 남기고서야 잠잠해졌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내 머릿속은 쉽게 멈추지 못하고 끝도 없이 생각의 생각을 물었다. 넌 다른 사람에게도 이렇게 안길까. 나에게처럼 화장실의 문을 반쯤 열어두곤 마지막 수건은 꼭 나의 눈앞에서 풀어 내리고, 가끔은 먼저 달라들어 위에 올라타는. 이 모든 것들을 그 사람에게도 똑같이 할까. 아니면, 그 사람에겐 얌전을 떨며 먼저 손을 뻗어오길 기다릴까. 나는 내게 감겨오는 너를 가볍게 안아주며 네가 몸을 들썩일 때마다 함께 몸을 움직여 주었다. 하지만,

 

 

 

'주은찬. 집중 안해?'

 

 

 

 그날의 섹스는 최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날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며 기분 나쁜 티를 그렇게도 내던 너를 겨우 만족시켜 재우고서야 나는 답이 나지 않던 질문을 다시금 되뇌었다. 마치 연인처럼 내어준 팔을 베고야 잠드는 품 안의 작은 너를 보면 그런 상상 따윈 하지 않고 싶지만, 너에게 가장 첫 번째인 사람은 누굴까, 그 사람에게는 다른 모습을 보일까, 하는 상상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네가 그 누구인가에게 짓눌리는 모습까지 상상하고야 눈을 꽉 감고 머릿속을 흐트러뜨리려 노력했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숨을 고르고 있을 때쯤, 얕은 진동이 울렸다. 내가 눈을 떠 그것이 누구의 핸드폰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품안에서 옴찔대는 네가 느껴졌고 나는 우습게도, 자는 척 눈을 꽉 감아버렸다.

 

 

 

 

 

 

'왜, 바빴어. 마감 코앞일 땐 연락 안 받는 거 너도 알잖아. 지금은 피곤해. 내일 봐. 내일 갈게'

 

 

 

 

 

 

 누굴까, 애써 헤쳐 두었던 생각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아까 그 개새끼인걸까. 얼핏 들으면 평범한 통화일지도 모르는 반쪽자리 대화를 들으며 나는 너를 또 다시 누군가의 품안으로 밀어 넣었다. 넌 여전히 내 품에 안겨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고, 이따금 몸을 돌려 내 손끝을 간질이기도 했다. 태연히 나를 만져대며 전화기를 붙잡고 툴툴대던 넌 정말 졸린 것인지 말끝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알았어어…. 나 진짜 졸려. 응, 응…. 내일 봐, 건아.'

 

 

 

 

 

 

 가만히 네 목소리를 듣고 있던 나는 무심코 눈을 뜰 뻔 했다. 네 입이 부른 이름이 내 귀에도 너무 익숙한 것이어서, 나는 당장에라도 눈을 떠 너를 바라보고 싶었다. 너무 놀라 움찔거리는 내 몸을 너도 느끼지 않았을까 겁이 날 정도로 그 이름에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쿵쾅대며 심장이 거세게 뛰어댔다. 네 곁에 바짝 붙어있는 너라면 갑작스레 빨리 뛰어대는 심장소리쯤이야 쉽게 알아챌 것만 같았다. 건, 건, 백건. 내가 아는 그 이름이 맞는 것일까. 나는 애써 숨을 골라내었다. 당장이라도 그 휴대폰을 빼앗아 발신자를 확인하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쾅쾅대는 심장을 잠재우기라도 하려는 듯 너는,

 

 

 

 

 

 

'나도…. 아, 참 귀찮게. 나도 사랑해, 백건. 응, 끊어….'

 

 

 

 

 

 

 내 귓가에 그 녀석의 이름을 정확히 쑤셔박았다. 나에겐 아무리 매달리고 괴롭혀도 허락하지 않았던 한마디는 너무도 쉽게도 내뱉어져 현실성마저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내 품안에 안겨있는 사람이 네가 아닌 다른 이일것만 같았다. 내가 아는 너는 이렇게 약하고 고분고분하지 못했다. 눈을 뜨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내 곁에 누워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당장에라도 눈을 뜨고 싶었다. 그 옅어지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너는 색색대는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고, 나는 네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도 한참이나 눈을 뜨지 못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라면 좋겠다고, 그렇게 수없이 말을 되뇌었다. 하지만….

 

 

 

 

 

 

'일어나, 나 일찍 나가봐야 해'

 

 

 

 

 

 

 다시 눈을 떴을 땐 집에 왔던 그 모습 그대로 내 앞에 서있는 네가 보일 뿐이었다. 왔던 네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서 서운함이 밀려들 것만 같았다. 나에겐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으려는 것만 같아서. 아침의 밝은 빛이 눈으로 떨어져 내려 네 모습이 흐릿했다. 내가 꿈을 꾼 건 아닐까, 하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내가 너무 터무니없이 사실적인 꿈을 꾼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 반대로 처음부터 너와 함께 있는 이 순간들이 모두 꿈인 걸까. 눈앞에서 겉옷까지 모두 챙겨 입고 여전히 잠에 취한 듯 한 나를 내려다보는 널 보며 난 정말 이 모든 게 내가 알고 꾸며낸 환상이 아닐까 뒤돌아 나가려는 네 손목을 붙잡았다. 그제야 맞춰지는 초점에 나는 한참이고 네 얼굴을 바라봤다.

 

 

 

 

 

 

'왜 이렇게 일찍 가, 가람아'

 

 

'약속있어'

 


'…누구랑?'

 

 

 

 

 

 

 내 목소리가 작게 떨려왔다. 잠에 취해 갈라진 목소리 같기도 했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랑? 간단한 말이었지만 다시금 가슴이 떨려오는 것 같았다. 점점 커지는 심장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사실대로 말해줄까, 백건을 만나러 간다고. 그럼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 처럼 잘 다녀오라고 웃어줘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하지만 그런 내 말에 넌 날 빤히 내려다보며 작게 인상을 썼다. 내 손에 잡힌 네 손목을 가볍게 비틀어 때어내곤 그새 붉어진 손마디를 돌리며 넌 대답했다.

 

 

 

 

 

 

'알거 없잖아'

 

 

 

 

 

 

 너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고, 나는 닫혀버린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손안에 미지근히 남아있는 네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 손을 꽉 쥐었다. 우스웠다. 내 자신이. 누구에게 가는 것인지, 알고 있으면서. 아니라는 확인을 받고 싶었던 걸까.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난 영원히 이 위치 이상으로는 옮겨갈 수 없다는 사실을. 꽤나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 한 켠이 무거웠다. 애초에 너에게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확인을 받을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그 상대가 십년은 훌쩍 넘긴 오랜 친구일 것이라는 사실 또한,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백건, 넌 알고 있을까.

 

 

 

 

 

 

 

 

 

 

 

 

"뭐야, 피곤해?"

 

 

 

 

 

 

 샤워를 마친 것인지, 어느새 넌 내 곁에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네 목소리에도 그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을 뿐이었다. 곁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며 달짝지근한 바디워시 향이 뜨끈한 네 몸의 열과 함께 옮겨왔다. 그 향에 코 끝이 간질거렸다. 뜨거운 기운에 몸이 풀려 머리가 멍해졌다. 지금 이렇게 네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은 일종의 투정이지만 내가 이 향을, 이 온기를, 이 순간을 언제까지고 잊고 살 수 있을까. 나는 조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몸 안 구석구석으로 네 향이 가득 찼다. 나는 제법 멍청한 축에 속하는 것 같다고 그 언젠가의 너는 말했다. 알고 있다. 그런 것쯤은.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의 그런 모습은 제법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지만 모든 것을 알고도 이런 멍청을 떨만큼 좋은 사람은 너밖에 없다는 것. 그것은 평생 네가 몰라야할 사실이었다.

 

 

 

 

 

 

"미리 말하지. 나중에 와도 되는데."

 

 

 

 

 

 

 가는 손가락이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 손끝이 너무 따뜻해서, 나는 울컥하고 올라오는 무엇인가를 애써 눌러야했다. 오늘은 유난히 시간이 촉박한 만남인걸 알고 있다. 해가 어스름 넘어갈 시간, 완전히 어둠이 내리면 누군가에게로 옮겨갈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이후로 또 누굴 만나러갈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어렴풋 짐작은 갔다. 그런 내 머릿속을 알고 있다는 듯 너는 하염없이 내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 손길에 이런저런 잡생각이 옅어지는 것 같다가도 그 녀석에도 그럴까,하는 우스운 생각에 다짜고자 네 손목을 잡아챘다.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언제까지고 내 곁에만 있어줬으면 좋겠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네가 없이는 못 살거 같은데. 내 행동에 너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빤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네 표정이, 가려진 시야 안으로 그려졌다.

 

 

 앞으론 오지마. 이제 그만하자, 청가람.

 

 

 어쩌면, 간단한 말일지도 몰랐다. 내가 그만하잔 소리를 하더라도 청가람은 쿨하게 알겠다고 할 것을 알고 있다. 지금처럼 손을 놓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고, 나만 이 붙잡은 손을 놓는다면 모든 것은 정리될 것임을 알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좋아해온 너와 겨우 몸을 섞게 되었고, 너에게 다른 사람이 있음을 알고도 이런 관계를 시작했다. 얼마 전에야, 그 사람이 나의 오랜 친구인 백건임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너를….

 

 

 

 

 

 

"놓기 싫어"

 

 

 

 

 

 

 나는 잡고 있는 팔을 잡아 당겨 입을 맞추었다. 너는 그제야 입꼬리에 웃음을 걸치며 나를 끌어올렸다. 나는 그대로 딸려 올라가 다시 너를 눕혔다. 너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이렇게 몇 번이고,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구를 수밖에 없다. 가난한 하수인과 모든 걸 가지고도 욕심을 부리는 여왕쯤 될까. 나는 그 생글대는 눈가에 입을 맞추곤 목덜미를 진득하게 핥았다. 내가 가질 수 있는 이 향을, 지금의 너를, 조금이라도 더 가지고 싶어서. 백건, 너에게 조금도 남겨주고 싶지 않아서.

'둥굴레차! >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청주] 本色 - 上  (0) 2015.01.23
[현오가람/현우가람] 고민이 있습니다, 낭자  (0) 2015.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