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소리가 들린다. 이내 멈출 저 물소리는 한때는 내 이성을 시험하던 일종의 도구였다. 씻지 않고 내게 올 리가 없는 너지만 우리 집안에 들어서면 꼭 다시 씻던 넌, 내 시야에서 차단된 자신을 물소리와 함께 잔뜩 상상하며 애태워보란 듯이 항상 문을 완전히 닫아두지 않은 채 샤워를 했다. 힘 있게 바닥으로 내려치는 물소리와 몸을 타고 흐르다 타일로 씻겨 내려가는 물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나는 너 때문에 알게 되었다. 네가 사다두라고 닦달을 하던 바디워시 또한 사람의 살 냄새와 향이 섞이면 혀가 아릴정도로 단내가 난다는 것 또한, 모두 네가 가르쳐 준 것들이었다.
난 그저 침대에 얼굴을 묻고는 눈을 꽉 감았다. 언제인가는, 그 화장실의 문틈새로 씻는 널 훔쳐본 적도 있었다. 네가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그 틈사이로 가늘게 보이는 그 매끈한 몸을 끈적한 시선으로 핥아낸 적도 있었다. 아직도, 그 날의 넌 이렇게 눈을 꽉 감아도 단숨에 그려낼 수 있었다. 성인남자치곤 어려보이는 몸과 작은 체구, 말라 툭, 불거져 나온 뒷목의 뼈에서부터 작고 동그란 엉덩이를 쓸어내리던 손, 네 주변을 감싸며 피어오르던 김들과, 하얗다 못해 붉은 빛이 도는 몸을 타고 내리던 수없는 물방울까지. 나는 여전히, 네 모습을 상상하면 숨이 턱턱 막혀오고 가슴이 뻐근해지곤 한다. 이것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소리가 멈추었다. 넌 왱왱대는 드라이기로 머리를 반쯤 말리곤, 내 곁으로 올 것이다. 나는 느긋하지 할 수 없지만 느긋한 척을 하며 침대헤드에 비스듬히 기대 널 기다리고, 넌 허리에 수건을 감고는 여전히 물기를 머금은 머리를 가볍게 털어대며 내게로 걸어올 것이다.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존재인 것 마냥 한쪽 입꼬리를 가볍게 올리곤 침대곁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런 네게 잔뜩 홀린 표정을 지은 난 네 팔목을 잡아당기고 넌 엉거주춤하게 한쪽 무릎을 침대 위로 올리곤 좀 전보다 더 야릇하게 웃으며 허리춤에 감겨있던 수건을 풀어 던지며 내 위에 올라탈 것이다. 늘 비슷한 패턴의 유혹, 그걸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는 나의 보챔. 그리고 이어지는, 섹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전처럼 마냥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내가 변한 것일까, 네가 변한 것일까.
니가 내 위에 올라 나를 바짝 안고는 가쁜 템포로 허리를 놀렸던 어떤 날인가에, 나는 우연히 네게서 눈을 돌려 쉼 없이 반짝이는 네 핸드폰을 보았다. 휴대폰의 불빛은 이내 사라졌지만, 나는 이미 여러 통의 부재중전화가 쌓여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굴까, 누가 널 이렇게 찾는 것일까. 사실, 내가 네 첫 번째가 되지 못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저 사람도 나와 같이 너의 작은 부분이라도 나눠가지고 싶어 하는 어리고 어린 희생양인걸까. 개새끼,라고 저장되어있는 발신자는 그 뒤로도 서너통의 부재중 전화를 더 남기고서야 잠잠해졌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내 머릿속은 쉽게 멈추지 못하고 끝도 없이 생각의 생각을 물었다. 넌 다른 사람에게도 이렇게 안길까. 나에게처럼 화장실의 문을 반쯤 열어두곤 마지막 수건은 꼭 나의 눈앞에서 풀어 내리고, 가끔은 먼저 달라들어 위에 올라타는. 이 모든 것들을 그 사람에게도 똑같이 할까. 아니면, 그 사람에겐 얌전을 떨며 먼저 손을 뻗어오길 기다릴까. 나는 내게 감겨오는 너를 가볍게 안아주며 네가 몸을 들썩일 때마다 함께 몸을 움직여 주었다. 하지만,
'주은찬. 집중 안해?'
그날의 섹스는 최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날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며 기분 나쁜 티를 그렇게도 내던 너를 겨우 만족시켜 재우고서야 나는 답이 나지 않던 질문을 다시금 되뇌었다. 마치 연인처럼 내어준 팔을 베고야 잠드는 품 안의 작은 너를 보면 그런 상상 따윈 하지 않고 싶지만, 너에게 가장 첫 번째인 사람은 누굴까, 그 사람에게는 다른 모습을 보일까, 하는 상상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네가 그 누구인가에게 짓눌리는 모습까지 상상하고야 눈을 꽉 감고 머릿속을 흐트러뜨리려 노력했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숨을 고르고 있을 때쯤, 얕은 진동이 울렸다. 내가 눈을 떠 그것이 누구의 핸드폰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품안에서 옴찔대는 네가 느껴졌고 나는 우습게도, 자는 척 눈을 꽉 감아버렸다.
'왜, 바빴어. 마감 코앞일 땐 연락 안 받는 거 너도 알잖아. 지금은 피곤해. 내일 봐. 내일 갈게'
누굴까, 애써 헤쳐 두었던 생각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아까 그 개새끼인걸까. 얼핏 들으면 평범한 통화일지도 모르는 반쪽자리 대화를 들으며 나는 너를 또 다시 누군가의 품안으로 밀어 넣었다. 넌 여전히 내 품에 안겨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고, 이따금 몸을 돌려 내 손끝을 간질이기도 했다. 태연히 나를 만져대며 전화기를 붙잡고 툴툴대던 넌 정말 졸린 것인지 말끝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알았어어…. 나 진짜 졸려. 응, 응…. 내일 봐, 건아.'
가만히 네 목소리를 듣고 있던 나는 무심코 눈을 뜰 뻔 했다. 네 입이 부른 이름이 내 귀에도 너무 익숙한 것이어서, 나는 당장에라도 눈을 떠 너를 바라보고 싶었다. 너무 놀라 움찔거리는 내 몸을 너도 느끼지 않았을까 겁이 날 정도로 그 이름에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쿵쾅대며 심장이 거세게 뛰어댔다. 네 곁에 바짝 붙어있는 너라면 갑작스레 빨리 뛰어대는 심장소리쯤이야 쉽게 알아챌 것만 같았다. 건, 건, 백건. 내가 아는 그 이름이 맞는 것일까. 나는 애써 숨을 골라내었다. 당장이라도 그 휴대폰을 빼앗아 발신자를 확인하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쾅쾅대는 심장을 잠재우기라도 하려는 듯 너는,
'나도…. 아, 참 귀찮게. 나도 사랑해, 백건. 응, 끊어….'
내 귓가에 그 녀석의 이름을 정확히 쑤셔박았다. 나에겐 아무리 매달리고 괴롭혀도 허락하지 않았던 한마디는 너무도 쉽게도 내뱉어져 현실성마저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내 품안에 안겨있는 사람이 네가 아닌 다른 이일것만 같았다. 내가 아는 너는 이렇게 약하고 고분고분하지 못했다. 눈을 뜨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내 곁에 누워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당장에라도 눈을 뜨고 싶었다. 그 옅어지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너는 색색대는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고, 나는 네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도 한참이나 눈을 뜨지 못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라면 좋겠다고, 그렇게 수없이 말을 되뇌었다. 하지만….
'일어나, 나 일찍 나가봐야 해'
다시 눈을 떴을 땐 집에 왔던 그 모습 그대로 내 앞에 서있는 네가 보일 뿐이었다. 왔던 네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서 서운함이 밀려들 것만 같았다. 나에겐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으려는 것만 같아서. 아침의 밝은 빛이 눈으로 떨어져 내려 네 모습이 흐릿했다. 내가 꿈을 꾼 건 아닐까, 하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내가 너무 터무니없이 사실적인 꿈을 꾼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 반대로 처음부터 너와 함께 있는 이 순간들이 모두 꿈인 걸까. 눈앞에서 겉옷까지 모두 챙겨 입고 여전히 잠에 취한 듯 한 나를 내려다보는 널 보며 난 정말 이 모든 게 내가 알고 꾸며낸 환상이 아닐까 뒤돌아 나가려는 네 손목을 붙잡았다. 그제야 맞춰지는 초점에 나는 한참이고 네 얼굴을 바라봤다.
'왜 이렇게 일찍 가, 가람아'
'약속있어'
'…누구랑?'
내 목소리가 작게 떨려왔다. 잠에 취해 갈라진 목소리 같기도 했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랑? 간단한 말이었지만 다시금 가슴이 떨려오는 것 같았다. 점점 커지는 심장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사실대로 말해줄까, 백건을 만나러 간다고. 그럼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 처럼 잘 다녀오라고 웃어줘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하지만 그런 내 말에 넌 날 빤히 내려다보며 작게 인상을 썼다. 내 손에 잡힌 네 손목을 가볍게 비틀어 때어내곤 그새 붉어진 손마디를 돌리며 넌 대답했다.
'알거 없잖아'
너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고, 나는 닫혀버린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손안에 미지근히 남아있는 네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 손을 꽉 쥐었다. 우스웠다. 내 자신이. 누구에게 가는 것인지, 알고 있으면서. 아니라는 확인을 받고 싶었던 걸까.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난 영원히 이 위치 이상으로는 옮겨갈 수 없다는 사실을. 꽤나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 한 켠이 무거웠다. 애초에 너에게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확인을 받을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그 상대가 십년은 훌쩍 넘긴 오랜 친구일 것이라는 사실 또한,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백건, 넌 알고 있을까.
"뭐야, 피곤해?"
샤워를 마친 것인지, 어느새 넌 내 곁에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네 목소리에도 그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을 뿐이었다. 곁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며 달짝지근한 바디워시 향이 뜨끈한 네 몸의 열과 함께 옮겨왔다. 그 향에 코 끝이 간질거렸다. 뜨거운 기운에 몸이 풀려 머리가 멍해졌다. 지금 이렇게 네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은 일종의 투정이지만 내가 이 향을, 이 온기를, 이 순간을 언제까지고 잊고 살 수 있을까. 나는 조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몸 안 구석구석으로 네 향이 가득 찼다. 나는 제법 멍청한 축에 속하는 것 같다고 그 언젠가의 너는 말했다. 알고 있다. 그런 것쯤은.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의 그런 모습은 제법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지만 모든 것을 알고도 이런 멍청을 떨만큼 좋은 사람은 너밖에 없다는 것. 그것은 평생 네가 몰라야할 사실이었다.
"미리 말하지. 나중에 와도 되는데."
가는 손가락이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 손끝이 너무 따뜻해서, 나는 울컥하고 올라오는 무엇인가를 애써 눌러야했다. 오늘은 유난히 시간이 촉박한 만남인걸 알고 있다. 해가 어스름 넘어갈 시간, 완전히 어둠이 내리면 누군가에게로 옮겨갈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이후로 또 누굴 만나러갈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어렴풋 짐작은 갔다. 그런 내 머릿속을 알고 있다는 듯 너는 하염없이 내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 손길에 이런저런 잡생각이 옅어지는 것 같다가도 그 녀석에도 그럴까,하는 우스운 생각에 다짜고자 네 손목을 잡아챘다.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언제까지고 내 곁에만 있어줬으면 좋겠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네가 없이는 못 살거 같은데. 내 행동에 너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빤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네 표정이, 가려진 시야 안으로 그려졌다.
앞으론 오지마. 이제 그만하자, 청가람.
어쩌면, 간단한 말일지도 몰랐다. 내가 그만하잔 소리를 하더라도 청가람은 쿨하게 알겠다고 할 것을 알고 있다. 지금처럼 손을 놓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고, 나만 이 붙잡은 손을 놓는다면 모든 것은 정리될 것임을 알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좋아해온 너와 겨우 몸을 섞게 되었고, 너에게 다른 사람이 있음을 알고도 이런 관계를 시작했다. 얼마 전에야, 그 사람이 나의 오랜 친구인 백건임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너를….
"놓기 싫어"
나는 잡고 있는 팔을 잡아 당겨 입을 맞추었다. 너는 그제야 입꼬리에 웃음을 걸치며 나를 끌어올렸다. 나는 그대로 딸려 올라가 다시 너를 눕혔다. 너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이렇게 몇 번이고,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구를 수밖에 없다. 가난한 하수인과 모든 걸 가지고도 욕심을 부리는 여왕쯤 될까. 나는 그 생글대는 눈가에 입을 맞추곤 목덜미를 진득하게 핥았다. 내가 가질 수 있는 이 향을, 지금의 너를, 조금이라도 더 가지고 싶어서. 백건, 너에게 조금도 남겨주고 싶지 않아서.
'둥굴레차! >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청주] 本色 - 上 (0) | 2015.01.23 |
---|---|
[현오가람/현우가람] 고민이 있습니다, 낭자 (0) | 2015.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