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 가람아…."

 

"…뭐?"

 

 

 

 

 

 

 

 

나는 오늘 고백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누나. 오랜만이에요. 네? 얼굴이 폈다구요? 하하, 연애는 무슨…. 짝사랑 중이에요. 아마 가망도 없는…. 말해달라구요? 아 좀 부끄러운데. 그리고, 말하기가 좀 그래요. 아, 알았어요. 말할게요. 어…. 말하기 껄그러운 이유는…. 친구거든요. 그것도, 나랑 같은 나이의 남자애….

 

 이해한다구요? 정말? 아, 그럼 한시름 놨다. 음, 그럼 어디부터 얘기해야 될까. 좋아하기 시작한 때요? 아, 그거 괜찮다. 누나 있잖아요, 나는 여자친구를 사겨보지 못한 건 아닌데도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믿지 않았어요. 같이 지내다보니 좋아지고, 괜찮은 점이 보여서 사귀곤 했거든요. 그런데 그 앨 좋아하게 된 순간엔 첫눈에 반하다는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어요. 진짜 한 번 보고 반했거든요. 진짜 별 모습도 아니었어요. 걔가 나한테 가슴 설렐만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고 나한테 말을 건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걔한테 반했지 뭐에요.

 

 

 

"야, 이쪽으로 패스!"

 

"아오 이 등신아! 저쪽에 빽건한테 패스해야지"

 

 

 

 그땐 학기 초였어요. 아직은 날이 엄청 쌀쌀해서 난로 곁이 옆자리였는데도 창문이 옆에 있으니까 엄청 추웠던 날들 중 하나였거든요. 그 날은 진짜 지루한 문학시간이었어요. 개학한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애들 반 이상이 수업시간에 쓰러져 잘 정도였거든요. 수업은 지겨워 죽겠는데 끝나려면 한참 남았고 진짜 잠도 안와서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어요. 빽건 알죠? 저랑 8년 친구라는. 마침 걔네 반 애들이 체육수업을 하길래 왔다갔다 움직이는 공만 열심히 쫓고 있는데 진짜 쪼그만 애가 막 공이랑 같이 빨빨대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뭐, 저도 딱히 큰 건 아니지만 저보다 작아 보이는 애가 공을 몰고 혼자 둘 셋을 제껴 가면서 막 골대 쪽으로 가길래 곧 골 넣겠다 싶어서 마냥 보고 있었죠. 그리고 골문이 가까워질 무렵 킥을 날리는데, 골 인거예요. 쪼그만게 제법하네 싶어서 피식피식 웃음이 새는데 골을 넣어서 신이난건지 자기 편 애들 쪽으로 막 뛰어가면서 웃더라구요.

 

 

 

 그때 반한거냐구요?

 

 

 

 …네. 골 앞으로 다가가던 진지한 얼굴이 무색하게 해맑게 웃는 그 애를 보는데, 기분이 너무 이상했어요. 쌀쌀한 초봄에도 땀을 막 흘려가면서 자기 편 애들 사이에 둘러싸인 그 애는 그냥 흔히 보던 남고애 중 하나였는데도 눈이 안 떼졌어요. 웃는 건 그 애인데 내 기분이 막 좋고, 난 그 곁에 있지도, 골을 넣지도 않았는데 내가 웃고 있고, 나도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활짝 웃는 그 얼굴이 진짜…. 예뻤거든요.

 

 가람이랑 첫만남은 그랬어요. 아, 그 애 이름이 가람이에요. 청가람. 이름도 예쁘죠? 난 이름 세글자가 그렇게 깨끗하고 맑게 울릴 수 있는지 가람이 이름을 부르고 처음 알게 되었어요. 중증이라구요? 뭐…. 부정하지는 않을게요. 하하. 진짜 이름도 예쁜 걸 어떡해요. 누나도 발음해봐요. 이렇게 이쁜 이름이 없다니까. 뭐 아무튼, 그 날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저는 빽건한테 달려갔어요. 반은 달라도 가끔 밥을 같이 먹긴 했으니까 빽건은 그러려니 했겠지만 내 목적은 당연히 가람이였죠. 이름은 뭔지, 어디 사는지, 빽건이랑은 친한지 궁금한 것들 투성이였거든요. 그렇게 막 달려가서 빽건 어깨를 딱, 잡고 달려오느라 가쁜 숨을 고르고 고개를 딱, 드는데 가람이랑 눈이 딱 마주친거에요. 선홍빛 눈이 나와 마주치는데, 나 정말 숨이 멎는 줄 알았어요. 순간 숨을 쉬는 걸 잊어버릴 정도로 당황해서 고개를 확 돌리고 빽건한테 횡설수설했죠. 가람이 명찰에 박힌 이름 세글자는, 밥을 먹으면서야 볼 정신이 생겼었어요. 이름은 그때 알게 됐고, 어디 사는지, 어떤 애인지도 알게 됐고, 그 얼굴에 다시 한 번 반했어요. 골을 넣고 웃을 때처럼 그렇게 해맑게, 엄청 자주 웃는 애는 아니었는데 또 무뚝뚝하게 대꾸하는 표정이 왜 그렇게 예뻐 보이는지….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모르겠더라구요.

 

 

 

"주은찬? 빽건 막교시 째고 토꼈는데"

 

"어? 진짜? 와, 자기가 같이 가자고 했으면서"

 

"불쌍한 놈…."

 

"그럼 가람이랑 같이 가지 뭐"

 

"누가 같이 가 준대?"

 

 

 

 아마 좀 더 친해진 건 처음으로 둘만 하교하던 날인 것 같아요. 그때만 해도 그냥 밥 가끔 같이 먹고, 가끔 같이 축구하고, 마주치면 그냥 인사만 하는 수준이었거든요. 물론 전 그걸로도 충분히 만족하긴 했지만. 가람이를 알게 되고 나서 빽건이랑 하교하는 날이 부쩍 많아졌는데 빽건이 학교를 째는 바람에 가람이랑 단 둘이 걷게 됐어요. 셋이 집 가는 길이 비슷했거든요. 평소처럼 이런 저런 얘길 하면서 길을 걷는데, 도로 한 복판에서도 어쩜 그렇게 가람이 목소리만 들리는지…. 가람이 목소리가 그렇게 큰 편은 아닌데도 말이에요. 전 괜히 들떠서 이런 저런 얘기를 막 해주다가 말이 끊겼는데도 신이 나서 콧노래도 막 불렀어요. 허밍하면서 걷는데, 가람이가 대뜸

 

 

 

"야, 너 노래 많이 알아?"

 

 

 

 하고 묻더라구요. 노래 듣는 건 좋아하니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가람인 그럼 카톡으로 들을만한 노래제목을 보내달라고 했어요.

 

 

 

"무슨 노래 좋아하는데?"

 

"딱히. 상관없어."

 

"음, 슬프거나, 신나거나 그런 것도 상관없고?"

 

"기왕이면 신나는 노래가 낫지. 슬픈 건 찌질해 보여서 별로야. 그럼, 부탁해"

 

 

 

 그 말을 뒤로 가람이는 자기 아파트단지로 들어갔고 전 그 말이 또 귀여워서 가람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어요. 그리곤 빨리 집으로 뛰어가서 노래 목록들 정리했죠. 가람이가 들어줬으면 좋겠다, 싶은 노래들을 고심하고 고심해서. PC카톡으로 대화창을 켜고 정리한 노래 목록을 보냈는데, 노래가 죄다 사랑에 빠진 노래 밖에 없는 거예요. 사랑을 시작하는 노래, 설레 죽겠다는 노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수줍은 노래, 사랑에 잔뜩 빠진 노래…. 가람이가 들어줬으면 하는 노래가 다 그런 식인 게 조금 웃기다가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어줬으면 싶었어요. 내가 그 노래를 들으면서 느끼는 기분을 가람이도 느꼈으면 좋겠고, 내가 골라준 노래를 들으면서 내 생각 한 번만 해줬으면 좋겠고. 그 뒤로 가람이가 노래 듣는 데에 재미를 붙였는지 오히려 저한테 이거저거 들어보라고 골라주더라구요. 웃긴 건, 가람이가 골라주는 노래도 죄다 온 몸이 간질간질한 노래들뿐이었단 거죠. 가람이가 추천해준 노래를 들으면 그 가사 속 주인공들은 나랑 가람이가 되어 있어서 더 좋았어요. 웃기죠? 겨우 골라준 노래 몇 곡에 그 날은 하루종일 기분이 좋다는 게. 사실 그 핑계로 연락을 한 번 더 하고, 가람이 목소릴 한 번 더 듣는 것도 좋은 이유 중에 하나였지만.

 

 우린 그렇게 조금씩 더 친해졌어요.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에서 조금 더 연락하고, 밤에도 부담 없이 불러내서 만나고, 휴일을 같이 보내기도 하고. 그러면서, 전 점점 힘들어졌죠. 친해지는 게 더 힘들었어요. 가람인 날 그저 친한 친구로 보는데, 내가 그 관계를 깨뜨릴 까봐. 나는 가람이 카톡 하나에도 설레서 졸린 눈을 비비면서 답해주는데 가람인 어느 순간 뚝, 카톡을 끊고는 잠들었다며 대답해 줄때나 내 앞에서 다른 친구들에게 더 웃어줄 때, 내가 아닌 사람에게 더 연락이 빨리 올 때나 상태메세지가 나와 다른 느낌일때…. 다른 친구들이 그럴 땐 아무런 느낌도 없는 무수한 일들이 가람이가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 눈에 밟혔어요. 유치한 일에도 질투가 나고, 혼자 설레고 혼자 실망하고. 우스운 짓만 반복했죠. 물론, 지금도….

 

 

 

 관둘 생각은 없냐구요?

 

 

 누나도 사랑해본 적 있으니 알 거 아니에요. 그렇게 수십번 실망하고, 가슴 아파하고, 포기할 거라고 말해도 아주 작은 관심 하나면 다 잊어버리는거. 진짜 이상한 게요, 조금만 관심을 덜 주려고 하면 더 눈에 들어와요. 조회 한다고 고만고만한 애들이 잔뜩 모인 강당 안에서도 가람이가 한 눈에 보여요.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작은 뒷통수인데도 그게 구분이 가요. 어쩜 그렇게 눈에 잘 들어오는지 신기할 정도로요. 어쩌다 스치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대요. 옆에라도 앉아서 가람이가 나한테 기대면 심장소리가 너무 커져서 가람이한테 들릴까봐 겁이 날 정도에요. 곁에 있으면서 조금 닿았던 팔이 떨어지면 아쉬워서 가람이가 닿았던 자리에만 자꾸 신경이 쓰이고 가끔 내가 가람이를 좋아하게 된 웃음을 지어주면 온 몸이 간질거려서 견딜 수가 없어요.

 

 

 

 진짜 웃기죠?

 

 

 

 가끔 나만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 너무 힘든데도 좋아요. 어쩌면 금방 사라질 감정일 수도 있고, 평생 동안 남아서 날 괴롭힐 수도 있는 감정이겠지만 포기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고백요? 하하, 글쎄요…. 고백해서 사귀고, 마음 놓고 가람이한테 좋다는 표현을 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서 엄두도 못내겠어요. 나는 가람이에게 내 마음을 다 얘기 한 뒤에도 가람이를 오래 좋아할 것 같은데 바라보지도 못하면 어떡해요.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 가끔 해주는 연락도 더 이상 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요. 그걸 생각하면 그냥 영원히 숨기고 이렇게라도 지내고 싶어져요…. 조금은 슬프지만.

 

 뭐. 그래도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누나. 덕분에 조금은 홀가분해졌어요. 앞으로 종종 와서 얘기해도 돼요? 가끔 가람이가 너무 예뻐 보이거나 속이 탈 때 올게요. 고마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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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누나! 오랜만이에요. 네? 얼굴이 폈다구요? 하하, 진짜 누나 눈은 못 속인다니까. 이제 연애 중이에요. 옆에는 누구냐구요? 내 입으로 말하기 좀 쑥스러운데. 아, 알았어요. 말할게요. 어…. 애인이에요. 내가 그렇게 속앓이 하던, 나랑 같은 나이의 남자애…. 가람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