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우도 수련을 하러 나간 시간, 가람은 바닥에 배를 깔고 컴퓨터 앞에 누워 타닥타닥 자판을 눌러댔다. 아무도 없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 문까지 단단히 걸어 잠궜지만 어디선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은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니, 내가 왜 이런 걸로 쫄아야 돼? 하면서도 괜히 등 뒤를 한번씩 바라보게 되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하얀 인터넷 창, 초록색 네모난 박스 안에 채워지는 글자는
[새들도 발정기가 있나요?]
가람은 제법 진지한 표정을 마우스의 휠을 돌리며 검색된 내용을 훑었다. 대충 요약을 하자면, YES! 발정기를 제외하고 번식을 하는 동물은 인간 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동물들은 발정기에만 번식을 한다는 말이겠죠? 가람은 나름대로 친절한 설명에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며 내용을 마저 읽고는 몸을 돌려 바로 누웠다.
"뭐야, 그럼 주은찬도 그거 때문인가보네!"
는 개뿔. 가람은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아무리 주작의 피를 이어받았다지만 은찬이 새일 리는 없었다. 은찬은 인간의 탈을 뒤집어쓰고 태어난다는-자신과 같은- 용족도 아니었고 청룡가문을 제외하면 백호, 주작, 현무 가문의 사람들이 동물의 족속으로 태어난 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그냥 선택받은 인간이란 뜻인 거지. 근데 왜? 가람은 다시 몸을 뒤집어 검색을 해보려 했으나 사신에 대한 이야기들이 공공연하게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닐 것 같지는 않아 그대로 두 팔에 얼굴을 묻었다. 괜히 두 볼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하여간! 그 녀석은 왜 그렇게 쓸데없이 착해선. 가람은 애써 모르는 척 하려 했으나 지난 밤 은찬의 손이 닿았던 곳들에서 열이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람은 요즘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것도, 순전히 은찬에게서 비롯된.
F e t i s h
처음엔 그저 사귀는 시간이 오래 지속되며 자연스레 스킨십이 진해진 것이라 생각했다. 원채 은찬은 다정한 성격이었고 자칫 어색해 질 수 있는 순간에도 요령 있게 잘 접근했었다. 은찬은 처음 손을 잡았던 날이나 입을 맞댔던 날부터 요 근래까지 몸을 맞대어 오는 타이밍에 있어서 너무도 자연스럽고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수줍은 것은 온전히 가람의 몫이었다. 그러나 요즘, 은찬의 모든 행동들은 평소에 비하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은찬이 가람의 몸에 닿는 횟수는 적어졌으나 스킨십이 적어질수록 은찬은 이상해져만 갔다.
끈적하고 짙어졌다고 설명하면 될까.
저녁을 준비할 때만 해도 식사준비를 돕겠다며 바짝 달라붙어 가람을 성가시게 하던 은찬은 오히려 멀찍이 떨어져서 가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싱글싱글 달라붙던 전의 눈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국의 간을 보며 삐딱하게 서있다가도 그런 은찬을 느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굳이 은찬임을 확인하지 않아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핥아 내리는 듯 한 시선은 뒷목에 소름이 오소소 돋으면서도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물론, 그 뿐이라면 고민조차 하지 않고 쳐다보지 말라며 몰아세웠을 가람이었으나 가끔 스치듯 닿는 은찬의 손길 또한 전과 다르게 미묘해져 있어 가람은 난감했다. 밥을 먹으며 가람의 손 옆에 있던 물컵을 가져갈 때 닿았던 손등이나, 져지의 깃이 접혀 있다며 정리해주며 목에 닿는 손마디, 찬장에 물건을 꺼내며 면티가 따라 올라갔을 때 옷을 끌어내려 주며 허리에 닿는 손, 이불 빨래를 밟으며 다리를 걷어 올렸을 때 흰 거품 사이로 진득하게 따라오는 시선들은 모두 가람을 불편하게 했다. 차라리 전처럼 귀찮게 들러붙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노골적이면서도 본심을 숨기는 눈빛과 행동들은 그것을 온전히 받아내는 가람으로 하여금 더 견뎌내기가 힘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 그 멍청이 때문에 왜 내가 머리가 아파야 하는 거야"
어제 밤만 해도 그랬다. 설거지를 시켜놨더니 유리컵들을 왕창 깨먹은 현우 덕에 유리조각들을 정리하다 발에 유리가 박혀 들어갔다. 따끔한 느낌을 애써 무시하고 바닥을 치운 가람은 바닥에 잔뜩 피칠갑이 되어있는 것을 보고 놀란 은찬이 급히 달려와 발을 씻어내고 작은 조각을 빼낼 때 까지 유리조각이 박힌 줄도 몰랐었다. 유리조각 하나만 박혀서 그렇게 피가 날 리 없다며 온 발을 쓸어대던 은찬은, 차마 그 얼굴을 바라보기에 부끄러울 정도로 발을 매만져 댔었다. 아킬레스건을 따라 발목에서부터 발등으로 내려온 손은 발바닥 사이로 내려와 발꿈치에서 발가락 끝을 쓸었다. 입술을 물지 않았더라면 현우나 건이 보고 있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아찔한 순간이었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손가락이며 발 옆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는 손에 가람은 애써 숨을 참으며 어질어질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야한 손놀림이었다.
그렇게 몸이 닳는다면 차라리 한 번 하자고 하지. 가람은 턱을 괴고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고 싶어도 못할 때가 있는 여자애도 아니고, 막말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참는 것인지, 가람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 몰라. 가람은 어떻게든 되겠지.하고 생각하는 것을 미뤄두기로 했다. 머리 아플 땐 게임이 최고지. 어느 폴더에 들었더라…. 주은찬 폴더였나. 가람은 끝도 없이 연결되어 있는 폴더를 클릭하고 클릭했다. 아, 어디다 둔거야! 가람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곤 끝이 보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폴더들을 눌러댔다. 어울리지 않게 바탕화면을 깨끗하게 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건덕에 늘 바탕화면을 간단하게 두어 북적거리는 것은 폴더뿐이었다.
"…직박구리?"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달칵이던 가람은 이름조차 바꾸지 않은 폴더를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이것저것을 모두 폴더에 모아두니 무엇이 들어있는지 항상 적어두던 폴더의 이름들 중 하나가 수상했던 것이다. 또 추잡스러운거 넣어둔 거 아냐? 가람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호기심이라는 게 한 칸 옆의 정체모를 폴더를 두고 얌전히 게임폴더를 누르게 두지 않았다. 딸칵딸칵,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가 또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괜히 죄를 짓는 듯 한 마음에 가람은 침을 삼키며 화면이 뜨기만을 기다렸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유난히 로딩 되는 속도가 느린 폴더에 바이러스가 들어있는 폴더인가?까지 의심하며 x표시를 누르려고 할 때였다.
"…사진?"
언뜻 보면 모델들의 화보 같기도, 야한 사진의 부분을 확대해 놓은 것 같기도 한 사진들은 꽤나 많은 양이 있는 것인지 두어번 휠을 돌려 보아도 여전히 로딩 중이었다. 뭐야, 주은찬. 야한 사진이나 모아 놓고 있었던 거야? 가람은 괜히 꽁해지는 기분에 얕게 인상을 쓰며 천천히 나타나는 사진들 중 하나를 클릭했다. 사진들은 야하다고 하기엔 평범했고 그저 예술적인 측면을 위해 촬영했다고 하기엔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첫 번째, 옆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목에 사선이 길게 그어진 흑백의 사진. 그 사진은 부드러운 어깨선을 따라 뻗어나간 곧은 쇄골이 보였고 가슴골이 보일 듯 한 지점에서 끊어져 있었다. 그 다음, 잔득 거품이 인 욕조 안에 유려하게 뻗은 다리와 매끈한 발목 그리고 그 모두를 감싸고 있는 빨간 구두를 신은 여자의 다리 사진. 아찔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발랄한 욕조의 분위기가 상반되어 더욱 이질적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어두운 불빛 아래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남자의 등 사진. 불뚝 튀어나온 견갑골과 그 주변의 잘 잡힌 근육들은 너른 어깨를 만들었고 가늘게 내려와 단단한 허리를 만들고 있었다. 가람은 마른 침을 삼켰다. 사진은 대게 이런 식이었다. 하얗고 마디가 굵지만 길고 단단한, 기도를 하는 손을 찍은 사진이라거나 허리에서 골반으로 넘어가는 동그란 곡선과 장골이 유난히도 두드러진 사진. 가람은 모니터에서 차마 눈을 떼지도 못한 채로 숨만 깊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헐벗고 있는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으나 마치 그런 사진을 본 것 마냥 가슴이 두근댔다. 동그란 엉덩이가, 립스틱을 짙게 바른 질끈 문 입술이, 아슬하게 하부를 감춘 하얀 척추선이 가람의 심장을 좀 더 빠르게 뛰게 했다. 눈앞에서 매끈한 사진들이 수도 없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 끝에 생각나는 사람은…. 가람은 그저 목이 탔다. 쉴 새 없이 마른 침이 넘어갔다. 색스럽게도 웃어주는 점이 달린 입가나, 벌어진 수련복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가슴팍, 제법 근육이 잡힌 허벅지와 자신을 매만지는 핏줄이 불거진 손등. 어느새 모든 사진들은 가람이 아는 한 사람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무리 숨을 들이쉬어도 가슴이 콱하고 옭죄이는 듯 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 이상한 사진 때문이야! 마치 야한 영상을 처음 보는 아이처럼 후다닥 폴더를 끈 가람은 컴퓨터를 종료시키고도 한참이나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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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가람은 자신을 피하던 은찬만큼이나 그를 피하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억지로 눈이라도 마주치려 하면 은찬의 곳곳이 가람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찬장을 뒤적이며 먹을 것을 찾는 은찬을 돌아봤을 때 눈에 들어오는 은찬의 쇄골, 빨래 너는 것을 도와주겠다며 다가와 부딪히던 손, 수련복 바지 아래로 살짝 드러나는 복사뼈나 간을 보겠다며 씻자마자 바로 나온 등…. 가람은 그제야 저를 핥는 듯이 바라보았던 은찬의 시선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 또한 은찬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설상가상으로 애써 피하던 은찬은 누굴 보여주려는 건지 하의만 꿰어 입고 나와 목에 수건을 걸친 채로 가람의 곁에서 찌개의 간을 봤다. 아, 진짜 주은찬…. 가람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힐끔대며 제 곁의 은찬을 바라보았다. 제법 다부지게 잡힌 등 근육은 탄탄해 보였고 그새 어깨가 좀 더 벌어진 것인지 더 가늘게만 보이는 허리는 달려들어 안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내게 했다. 억지로 눈을 돌리며 바글바글 끓는 찌개 곁에서 가람은 속이 타들어 갈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얼마 전 보았던 사진과 교묘히 겹쳐보이는 것도 같았다. 현우와 백건은 여전히 수련을 하고 있는데. 조금만 안아보면 안 되는 걸까. 그럼 다른 걸 더 하고 싶게 될까? 가람은 더 이상 필요도 없는 파를 썰어대며 자꾸 은찬의 허리에 머무르려는 시선을 갈무리 했다.
"맛있다. 간도 딱 맞는데?"
"아, 그래? 그럼 됐어"
"응, 그럼 밥 차릴 때 불러. 도와줄게."
가람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찬은 그저 웃으며 국자를 내려놓았고 가람은 돌아서서 사라지려는 은찬의 몸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썰고 있는 파에 집중했다. 통통통, 하는 규칙적인 소리와 함께 일정한 두께로 썰어지던 파는 은찬의 맨 팔뚝이 져지를 걷어올린 가람의 맨 살에 닿는 순간 흐트러졌다.
"…아…!"
갑작스레 닿는 은찬의 온도에 놀라 불규칙해진 칼질은 가람의 손가락을 벴다. 손끝이 베이는 선명한 느낌에 가람의 입에선 저절로 소리가 샜다. 새빨간 피가 도마 위를 타고 흐르자 칼에서 손을 뗀 가람이 손을 모으며 입에다 가져다 댔다. 소리가 새어나오느라 벌어진 입 안으로 벤 손가락을 넣으려 할 때,
"정신 안 차리지, 청가람."
은찬은 가람의 손목을 쥐곤 가람을 바라보았다. 당황하듯 붉어진 가람의 눈가를 진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은찬은 가람의 손가락에서 방울져 흘러내리는 피를 핥아 올렸다. 벌어진 살에 닿는 혀에 가람은 작게 움찔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고 은찬은 그런 가람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가람의 손가락을 입에 담았다. 혀끝으로 상처부위를 꾹 누른 은찬은 아랫입술을 움직여 가람의 손가락을 핥아올렸다. 묘하면서도 간질거리는 그 느낌에 가람은 크게 숨을 내쉬었고 기어코 입 안으로 손가락 모두를 빨아들이는 은찬에 가람은 놀란 눈으로 은찬의 눈을 마주했다. 흔들림 하나 없이 가람을 마주하는 은찬은 오히려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 눈을 바라보는 것을 즐기는 듯 한 은찬은 가람의 손가락을 빨아들이며 제 입에서 빼내었다. 은찬은 그 틈에 손을 거두려는 가람의 손을 다시 휘어잡으며 혀끝으로 손가락을 핥아내려 손가락 사이를 가볍게 물었다.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도 자신이 힘을 주어 잡고 있는 붉은 손목에 입술을 내려 이를 내곤 살살 긁어대었다.
"그…, 그만해, 주은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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