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해가 서산너머로 내리기 시작하는 것을 바라보며 궁을 나갈 채비를 했다. 그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은 태양빛에 더 붉게 빛나는 자신의 주작궁이었으나 해가 저무는 시점부터 다시 타오를 때까지는 달밤에 더욱 은은하게 빛나는 청룡궁에서 밤을 보냈다. 거추장스러운 복식을 벗고 지상에서처럼 가벼운 수련복차림을 한 남자는 오늘도 자신의 정원으로 향했다. 여름을 상징하는 주작궁은 그 의미처럼 늘 해가 찬란하게 빛났다. 특히나 그가 아끼는 그의 정원은 푸른 녹음 사이에서 붉디 붉게 빛나는 장미의 정원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남자는 늘 그랬던 것처럼 정원에서 자신의 머리색처럼 붉은 장미꽃을 한아름 꺾어 안아들곤 동향의 청룡궁으로 향했다.
"주작님 오셨습니까"
"휘는?"
"휘아님은…."
"아빠!"
태양빛에도 푸른 기와가 은은하게 비추는 청룡궁은 늘 그렇듯 은찬을 맞이했다. 여럿의 시종이 줄에 줄을 이어 그의 앞에 서 머리를 조아렸지만 은찬은 그저 그들 너머로 다른 이를 우선 찾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찾을 때 마다 품 안의 붉은 장미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향을 내뿜었다. 시종 중 하나가 그가 찾는 이에 대해 운을 띄우기도 전에 주작궁의 온 마루가 작은 발소리로 가득 차며 작은 아이가 얼굴을 내비췄다. 댓살이 겨우 된 듯 한 아이는 도도도도 하는 가쁘고 어린 소리를 내며 은찬에게로 달려왔다. 품 안의 줄기가 혹여 아이에게 상처를 입힐까 주위의 시종에게 꽃다발을 맡긴 은찬은 달려오는 아이를 한 품에 안아 올렸다.
"응, 오늘도 잘 있었어? 오늘은 우리 휘가 보고 싶어서 조금 일찍 왔어"
"휘도 아빠 보고 싶었어!"
아이는 은찬의 목을 좀 더 꽉 끌어안으며 가까이 밀착했다. 아이의 갈색빛 머리칼이 은찬의 턱을 간질였고 은찬은 그것을 보며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는 종일 이 순간만을 기다린 것 마냥 은찬에게 매달려 부벼대었다. 그저 웃으며 머리를 쓸어주니 휘의 선홍빛 눈이 은찬을 마주했다. 은찬은 한참이고 그 눈을 내려다보았고 그 모습에서 누군가를 떠올린 듯 기분 좋게 휘어진 눈으로 휘를 데리고 밖을 나섰다.
주작궁이 여름을 상징한다면, 청룡궁은 봄이었다. 계절이 시작하는 시기인 만큼 청룡궁은 그 주인의 힘이 미약하여도 늘 만개한 봄의 날씨인 채였다. 짙푸른 녹음이 아닌, 수줍게 싹을 틔우는 연둣빛 잎들과 봄의 수줍음을 닮은 연하고 여린 꽃들은 석양에 비칠 때면 얼굴을 붉히던 그 주인과 닮아 있었다. 부끄러워 좋아한단 말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제 곁의 청룡. 은찬은 그를 떠올리며 아이를 조금 더 바짝 끌어안았다. 어느 곳이던 날이 좋은 청룡지에서도 두 남자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너른 들이었다. 늘 얕게 자라있는 잔디는 그 어느곳 보다도 푹신했고 그의 손길처럼 간질거리는 바람이 수도 없이 부는 곳. 은찬은 그 중앙의 커다란 나무 아래로 천천히 걸어가며 주변을 눈에 담았다. 언제와도 변함이 없는 곳. 은찬은 그 곳에서 함께 누워 잠을 청하던 언젠가를 떠올렸다. 그리도 행복했던, 어린 날. 몸은 언제나 같은 모습을 유지하겠지만 그 날은 다시 올 수 없음을 역겁의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된 만큼 은찬은 추억 속에 자리한 둘의 모습이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아빠-. 근데…."
"응, 휘아야"
"아빠는 왜 맨날 꽃을 가져 오는 거야?"
목에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은찬의 목덜미를 간지럽혀 대던 휘가 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붉은 눈동자를 바라볼 때 마다 자꾸만 누군가가 생각이 나서, 은찬은 그저 웃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를 닮아 예쁜 아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은 자신이 평생을 가슴에 담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은찬은 꼭 그에게 말하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더 밝게 웃어주며 대답했다.
"좋아할테니까. 좋다고 말은 못해도 속으론 좋아할 사람이거든."
그 말을 들은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찬이 말해주는 것의 반은 알아들었을까 싶었지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흰 들꽃이 만발한 곳을 가리키며 은찬의 옷자락을 붙잡아 끌었다.
"아빠! 저기 꽃!"
"응, 꽃이 잔뜩 피었네?"
"나도 엄마한테 꽃 줄거야"
외모는 청룡을 쏙 빼다박았지만 성격은 은찬을 닮은 것인지 매사에 겁이 많아 은찬의 품이 아니면 청룡궁 밖을 벗어나지도 않는 아이가 은찬을 세워 꽃들 사이로 달려나갔다. 은찬은 제 품을 빠르게 빠져나가는 아이를 따라 꽃이 만발한 속을 헤집었다. 은찬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아이가 벌써 저만큼이나 컸어, 은찬은 휘를 보며 빈 허공에 읊조렸다. 아이 키의 반쯤 될까 싶은 작은 꽃들이 아이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휘는 꽃들의 속에서 제 손톱만한 작은 들꽃들을 꺾어나갔다. 가는 꽃들이 모이고 모여 은찬이 가져오던 꽃다발의 크기만큼 커지자 아이는 한아름 안고있는 다발을 들고 웃으며 은찬에게로 달려왔다.
"엄마 선물이야!"
그에 은찬은 웃으며 대답했다. 응, 엄마가 좋아하겠다. 아이는 웃으며 다시 은찬에게 안기려 보챘고 은찬은 아이를 다시 안아올리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벌써, 엄마생각 할 줄도 아네."
"응, 맨날 아빠가 두는 그 꽃병에 꽂아 둘거야"
은찬은 그 말에 그저 아이를 소중히 안고는 청룡궁으로 향했다. 좋아해 줄까? 아이가 너를 위해 처음 가져다주는 선물을. 은찬은 걸음을 바삐했다.
-
청룡궁에 다다랐을 때, 아이는 서둘러 은찬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은찬은 평소와 다른 휘의 반응에 놀라 떨어지려는 아이를 단단히 고쳐 안았고 아이는 내려달라는 소리만을 반복하다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흡, 하고 놀라 숨을 마신 것 같기도 했다. 그에 은찬이 고개를 돌렸을 때, 또 하나의 목소리와 함께 푸른 머리칼을 휘날리는 가람이 삐딱하게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
"주은찬! 애 자꾸 안고 다니지 말랬지"
"아냐, 휘 이제 내려갈거야, 응, 내려가!"
"니가 맨날 안고 다니니까 애가 자기 발로는 한발자국도 안 움직이려고 하잖아"
가람은 얕게 인상을 쓰며 다가와 은찬의 품에 안겨있는 휘를 내려두었다. 휘보다 좀 더 어린 듯 한 아이는 은찬을 보자마자 신이나 은찬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고 은찬은 멋쩍게 웃으며 가람을 바라보았다.
"화내면 애기한테 안 좋아"
"뭐. 애 한 두 번 품어 본 것도 아니고. 이정도는 해줘야 애가 적당히 순해"
은찬은 가람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가람의 배로 손을 가져다대며 웃었다. 배가 조금씩 불러오기 시작한 후로는 정복을 입지 않은 덕에 수련복 아래로 바로 느껴지는 배는 체온이 높은 은찬의 손과 온도가 딱 맞았다. 아빠가 하루 종일 보고 싶었어요, 우리 아가. 은찬이 배를 살살 문지르며 얘길 꺼내자 가람은 그저 눈을 흘겼다. 하여튼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능글맞아져요. 투덜대며 무어라 얘기를 더 꺼내려는데 둘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휘가 가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흔들어대었다.
"엄마, 엄마. 이거…."
"…이게 뭐야?"
가람은 건네지는 하얀 들꽃 다발을 받아들며 되물었다. 선물이야! 하며 환히 웃는 아이는 멍한 가람의 표정을 살피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거 맞나? 아빠가 좋아할 거라고 했는데. 아이는 입술 끝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가람이 반응하길 기다렸다. 가람은 꽃다발과 아이의 얼굴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더니 발개진 눈을 하곤 자세를 낮추어 휘를 끌어안았다. 나도! 나도! 하고 은찬에게 매달려 있는 아이가 가람에게 달라들었다. 가람은 그렇게 두 아이를 한참이나 끌어안고 있었고 은찬은 가람의 얼굴아래 땅이 젖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고마워, 고마워, 아가. 엄마, 너무 기분 좋다."
-
"많이 컸지?"
은찬이 붉은 장미꽃과 하얀 들꽃을 꽃병에 정리하며 가람에게 물었다. 겨우 두 아이를 재우고 자신의 침실로 돌아온 가람은 은찬의 등을 끌어안은 채였다. 가람은 대답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은찬은 자신의 배쪽으로 둘러진 가람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보들한 손등을 쓸어주었다. 가람이 고개를 묻고 있는 등언저리가 뜨거웠다. 은찬은 몸을 돌려 가람을 끌어안아 주었다. 이러다 얼굴 붓겠네. 두 뺨을 감싸 여전히 발간 눈가를 닦아내 주며 은찬은 말했다. 이번엔 딸일까? 애기 엄마가 너무 감성적인 것 같아. 그런 은찬의 말에 가람은 찡한 코끝을 애써 무시하며 은찬을 쏘아보았다.
"그렇게 봐도 사랑스러운 걸"
"시끄러. 입만 살아선"
"근데, 딸이었으면 좋겠다. 가람이 너랑 똑 닮은"
아마, 우리집 최고의 공주님이 되지 않을까? 나중에 시집은 어떻게 보내지? 그냥 평생 우리가 데리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널 닮은 사랑스런 여자아이라면. 가람을 보던 눈을 굴리며 은찬이 말했다. 가람은 한마디만 덧붙일뿐이었다.
"하여튼, 김칫국부터 마시긴. 애가 다 듣는다, 너"
"뭐, 막내 왕자님이라도 행복하겠지만."
은찬은 가람의 눈가에 입맞춰 주곤 가람을 껴안고 뒤뚱뒤뚱 침대로 향했다. 가람을 침대에 뉘이고, 옷을 편하게 정리해준 후 자신도 그 곁에 누웠다. 바로 머리에 손을 괴곤 가람을 바라보며 배를 쓸어댔지만 가람은 그저 은찬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을 뿐이었다.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며 가람은 조근조근 이야기를 꺼냈다.
"나 있잖아"
"응"
"솔직히 너랑 처음 만났을 때도 아니, 니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도 이렇게까지 행복해질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난 늘 이 순간을 그려왔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너랑, 너와 함께할 우리 애기들이랑 언제나 이렇게 행복하기만 할 순간을, 늘 상상해왔었어"
"진짜?"
가람은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은찬을 바라봤다. 뭐야, 그런 상상해온 거였으면 나한테 말해주면 좋잖아. 그럼 상상만으로도 행복했을 텐데. 조금 투정이 섞인 말투에 은찬은 웃었다. 원래, 선물은 모르고 받아야 더 놀랍고 행복한거잖아. 은찬이 가람의 귓가에 속삭여주며 가람의 배를 둥글게 쓸었다. 가람을, 그리고 가람의 배를 바라보는 은찬의 눈은 고요하고, 다정했다.
"아가, 엄마 고생시키지 말고 건강히 나와서 아빠랑, 엄마랑 오빠나 형아랑 같이 다 행복하자?"
그에 가람은 또 새침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은찬에게 대꾸하려다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런 가람의 행동에 은찬 또한 쓸던 배를 멈추며 놀라 동그래진 가람의 눈을 바라보았다. 은찬의 손 아래에서 가람의 심장소리가 아닌, 다른 둔탁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가람은 자신을 바라보는 은찬의 눈을 보며 두어번 깜빡였다. 이것은 두 번의 출산을 겪은 부부에겐 익숙하면서도 늘 새로운 움직임이었다.
"방금, 느꼈지?"
동시에 내뱉은 말에 둘은 눈을 마주하며 웃었다. 행복은, 늘 함께 온다.
그리고 그 행복은 늘 눈이 부시도록 빛이 난다.
*
벌써 30일이 되었네요.
이제 하루만 더 있으면 정말정말 좋아했던 두 아이들이 가요. 늘 행복하겠지만, 끝의 끝에서도 행복하길 바라면서..
너희는 애 셋 낳고 꼭 행복해야해ㅠㅠㅠㅠㅠㅠㅠ
은찬아 가람아! 너희 때문에 정말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했어. 이 글을 볼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행복해야해! 고마웠어!
덧붙이자면 휘는 그냥 아명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빛날 휘.
휘아는 빛나는 아이라는 뜻에서 시종들이나 직위가 낮은 사람들이 휘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라고 혼자 설정한..ㅎㅎ..ㅎ
나머지 자잘한 설정들은 스루합니다
아 그리고 찬가람네 막내는 절대적으로 딸입니다. 아들-아들-딸이어야 해요.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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