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같은 건, 바라지 않았다.
"어서 자라 내 자릴 대신 하렴"
"무술을 하지 못하는 몸으로 만드는 건 쉽지"
애초에,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지 않는 지도 오래였다. 나는 내가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자리를 대신할 대용으로 태어난 존재, 굳이 사랑을 갈구하며 살아갈 의무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사랑이란 건, 절대적으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남자를 좋아했다. 아니, 좋아한다. 우습게도, 내 첫사랑은 나를 죽이려한 나의 아빠였고, 두 번째 사랑은 늘 같은 길로 등교를 하던-이름 밖에 모르는- 어떤 고등학생 형이었다. 처음부터,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우그러질 마음이었으므로 나는 딱히 내 감정을 밖으로 내 놓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그렇게 손가락질을 받아야만 하는 일인지는 꿈에도 몰랐었다. 나의 첫 시작은 남자였고, 두 번째도 남자였으므로 태생적으로 남자를 좋아하는 나는 동성을 좋아한다는 의미가 그렇게도 혐오스러운 것인지를 중학교쯤이 되어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로 깨우쳤다. 그리고…. 우습지만,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새로운 사랑은 찾아왔다. 정말 우습지도 않은 사랑이었다.
"장보러 가? 같이 갈래?"
"내가 도와줄게. 같이 하자."
내 세 번째 사랑은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또래의 남자아이였고 나는 늘 그랬듯 그 마음을 숨기려했다. 아니, 내 사랑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난 후에는 숨겨야만 했다. 하지만 그 녀석은 지겹도록 다정했고 질릴만큼 친절했다. 아무리 밀어내려 애를 써도 녀석은 벌려놓은 거리보다 더 가까이 다가와 내 진을 빼 놓았고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으려 애를 써도 늘 한 발 앞서 친절을 베풀어 두었다. 어쩌다 잠깐 스친 모습을 보고 두근거리던 옛날과는 다르게 매일을, 매 시간을 마주치며 부대껴야 하는 녀석에겐 마음을 멀리하고 싶어도 더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내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녀석은 사람을 읽는데 정통한 인간이었고 결국은….
"청가람. 너 나 좋아해?"
라고 물어왔다. 유난스럽게도 빠른 눈치로 내가 애써 감춰온 사실을 한 번에 들춰낸 녀석은 녀석의 말로 잔뜩 얼어버린 내 표정을 샅샅이 읽어대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란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데 녀석은 그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어대며 어떤 말을 해주어야 내가 상처받지 않을까 따위를 궁리하고 있었었다. 내가 그리도 오랫동안 삭혀온 일들을 너무도 쉽게, 한 순간에 무너뜨린 녀석은 내 울 것만 같은 표정에도 내 마음을 부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미안해, 가람아. 나는 남자한텐 관심이 없어서."
"그리고…, 이미 여자친구도 있는 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녀석은 나와는 다르게 뼛속까지 이성을 좋아하는 인간이었다. 영원한 평행선. 절대로 맞닿을 수 없는 그 선위에 너와 나는 놓여 살고 있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나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과 사실을 내 귀로 직접 듣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울었다. 죄스러워 차마 소리조차 낼 수 없는 울음이었다.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땅바닥을 잔뜩 적시는 것을 보며 나는 녀석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내 사랑을 한 번도 잡아본 적 없는 나였으나 그 녀석은, 그 녀석만은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너와 함께라면,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한데. 나는 녀석을 부여잡고 울며 말했다. 니가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어. 지금 니 곁에 누가 있든 나는 버틸테니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애정만을 주면 안 돼?
"날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 주은찬. 사귄다거나 그런 거창한 건 바라지도 않아. 그냥,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나는 그렇게 울며 말했으나 차마 녀석의 얼굴조차 마주하지 못했다. 녀석의 눈이 어렸을 때 보았던 경멸스런 눈을 하고 있을까 무서웠다. 나로서는 나의 세상이 뒤집힐 만한 일을 한 것이었으나 그 결과가 좋을거라곤 단정지을 수 없었기에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그리도 두려웠다. 그에 녀석은 낮게 한숨을 쉬었고 발끝만 바라보며 우는 내 얼굴을 들어올려 눈물을 닦아내 주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놀라 심장이 쿵쾅대었는데, 녀석은 그런 날 보며 노력해 보겠다 말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 후엔 눈물이 그친 대신 한참이나 딸꾹질을 해 댔던 것 같다.
그 뒤론, 제법 관심을 받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녀석은 늘 그랬던 것처럼 지독히도 다정하고 늘 그렇듯 친절했지만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가끔 수고했다며 내 머릴 쓰다듬어주거나 잘 자라며 품에 안아주거나 아주 가끔, 내가 가라앉을 때면 이마에 입을 대어주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처음 받아보는 사랑이 담긴 행위들이었으므로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가끔, 아주 가끔 백건 녀석이 주은찬에게 "어디까지 갔냐?" 따위를 물으면 슬며시 자리를 피하곤 했지만 나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오늘 장보러 갈 거야? 같이 가, 그럼"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따라오던가."
오래간만에 장을 보러 가는 길, 나는 주은찬과 함께였고 그 녀석과 함께 라는 것만으로도 나는 들떠 있었다. 함께 물건을 고르고, 장본 것들이 손에 가득하기 먼저 짐을 들어주고. 이건 어때? 난 저게 더 좋아.라는 단란한 시간에 나는 내내 가슴이 설레어 애써 버티던 마음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쌀쌀한 날씨에 발갛게 달아오른 손에 입김을 불어가며 손을 녹이는데 녀석은 그것을 보곤 빈 손을 잡아 제 옷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나는 주은찬의 손에 잡힌 내 손이 너무도 황송하여 입술만 잘근거렸고 귀 끝까지 달아오르는 기분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조금, 아주 조그만 욕심이 피어올랐다.
"주은찬"
"응?"
나는 처음으로 주은찬의 입에 입술을 대어보았고, 이것은 나 스스로를 뒤흔드는 일이었다. 걷는 사람조차 없는 작은 골목, 그동안 제대로 마주보지도 못하던 네게로 고갤 돌려 입술을 대는 나. 늘 이렇다한 표현이 없던 나였기에 입술을 대는 내 행동으로 동그랗게 놀란 녀석의 눈은 제법 볼만했다. 찬바람에 바짝 마른 두 입술은 서로 닿는다 해서 엄청 대단한 느낌을 내지는 않았으나 사랑을 확인하는 곳이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감에 젖어있었다.
"은찬이 너…, 뭐, 뭐하는 거야?"
그 행복감은 단 1분도 가지 앉았지만. 나는 내지르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고, 이내 내리쳐진 뺨은 피가 몰려 얼얼해졌다. 그 순간에도 나는 녀석이 조금이라도 덜 곤란하길 바라며 잡고 있던 손을 빼내었지만 그 여자애는 날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넌 뭔데 내 남자친구에게 그러냐며 마구 때려댔다. 그래, 차라리 내가 녀석에게 입을 맞추었기에 망정이었지. 나는 화끈거리는 볼을 느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에 안 그래도 놀란 눈을 하고 있던 주은찬은 입이 쩍 벌어지며 여자애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 여자애에게 맞았다고 해서 화가 난다거나 열이 피어오르는 건 아니었다. 조용히 넘어가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지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내가 주은찬에게 폐가 된 것 같아 미안할 뿐이었다.
"너 게이야? 왜 여친도 있는 남자한테 찝적대느냔 말야!"
"나비야, 그런거 아냐. 니가 생각하는 그런게 아냐. 진정해봐"
"진정은 무슨! 너한테 입맞췄잖아! 다 봤단 말야. 내 남자친구한테 왜 그래!"
"일단, 일단 이리와"
여자애는 결국 주은찬에게 끌려갔다. 나는 주은찬의 붉은 머리칼 한올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바람을 피는 상황이었다면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얜 너보다 날 더 좋아하니 넌 그냥 깨끗이 헤어져 달라고 소리치며 아침드라마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머리채라도 쥘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자격조차 없었다. 나는 거절하는 주은찬을 붙잡고 붙잡아 애정을 달라 갈구한 걸리적거리는 애일뿐이었고 주은찬은 그 성격에 맞추어 착한 척을 조금 한 것뿐이었으니까. 나는 작게 한 숨을 내쉬며 길을 걸었다. 니가 그 여자애한테 갔더라도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올 거란 확신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나는 그것조차 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왜…, 나만 이래야 되는데."
문득, 참을 수 없이 서러워졌다.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가지고 싶어한 것은 많았으나 가져본 것이 없었다. 유일하게 같은 동족이라 생각했던 아버지의 사랑도, 겨우 붙들어 놓고 있던 주은찬의 손도. 질투를 하고 싶었다. 네 옆에 그 여자애랑 헤어지면 안 되겠냐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다. "내 남자친구"에게 왜 그러냐는 말이 너무도 부러웠다. 사랑받고 싶었다.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머리를 쓸어주다가도 부족하다 투정을 부리면 깊은 입맞춤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것은 그저 네가 불쌍함에 주는 애정을 조금 받는 것뿐이었고 더 이상을 바래서도 안 됐다. 또 눈물이 샜다. 그 와중에도 나는 내 눈가를 닦아주던 네가 생각났다. 나도 이렇게나 널 좋아하는데.
왜? 도대체 왜?
그제야 겨우 억눌렀던 욕심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 것 참아왔을 뿐이었다. 어떻게든 가질 방법은 많았다. 온전한 사랑을 받고 싶어 얌전한 척을 했을 뿐. 어차피, 지금 받는 손길도 분에 넘치는 것이었다. 지금의 관계를 망친다고 해서 내가 딱히 잃을 것은 없었다. 얼마 길지도 않은 생이었지만 치열하게 고민하던 것이 실은 별게 아니란 생각을 하니 눈물도 금세 멎었다. 나쁠 거 없잖아. 그냥, 조금 다를 뿐이지. 분명 착하기만 한 그 녀석은 이도 별 말없이 받아줄 터였다. 머릿속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아까 그 여자애처럼 주은찬의 손에 쥐어지고 싶었다. 잠깐이라도 그 품을 나만 가지고 싶었다. 그 머릿속엔 무엇이 있던 내 눈 앞에 나만 바라보는 주은찬이 있을 생각을 하면, 그걸로 만족할 것 같았다.
-
그렇게 주은찬은 밤이 되어야 돌아왔다. 그 여자애를 달래느라 진이 다 빠진 모양이었다. 그 시간동안 복잡하던 내 머리도 나름대로 식어 정리가 되었다. 나는 들어오는 주은찬에게 부러 눈을 맞추지 않았지만 그 녀석은 날 끌고 방으로 데려왔다. 불을 키곤 얼굴을 잡아 이리저리 살피는 너를 보며 나는 오는 길에 일었던 충동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억지로 눌러대었다. 너는 아직 옅게 붉은 빛이 도는 뺨을 쓸며 미안하다 말했고 팔을 걷어 멍이라도 든 곳은 없냐며 꼼꼼히도 살펴 대었다. 니가 왜. 왜 니가 미안해. 나는 그저 입술을 꽉 깨물곤 시선을 돌렸다. 쓸데없이 착한 것이 싫었다. 그 친절함에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하게 만드는 녀석이 지긋지긋했다. 이렇게 영원히 녀석에게서 헤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더 다친 데는 없는 거지? 벌써 얼굴 텄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이 튼 것은 오는 길 눈물을 흘려댄 탓에 부르튼 것일 게 분명했으니. 주은찬은 연신 내 볼을 쓸어대며 날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보지 마, 제발. 그 애틋한 눈빛 위로 머릿속에서 애써 지워낸 주은찬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미안해, 가람아. 나는 남자한텐 관심이 없어서.' 나는 입술을 꽉 물고는 내 앞에 있는 주은찬을 밀어뜨렸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주은찬,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나는 당황하고 있는 주은찬의 허리 위로 올라타 두 손으로 놀란 그 눈을 가리고 입을 맞추었다. 이미 벌어져 있는 입술 틈새로 혀를 밀어 넣어 어설프지만 최선을 다해 키스했다. 당황한 것도 잠시 능숙하게 따라오는 그에 나는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쓸데없는 배려. 나는 그것에 더욱 죽을 것 같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모질게 떼어내지. 두 번 다시 너를 넘볼 수 없도록. 나를 떼어내려는 손에 깍지를 껴 맞잡고 내 엉덩이 아래 닿아있는 주은찬의 위에서 허리를 움직였다. 주은찬은 그저 움찔댔고 나는 나대로 처음 닿는 그 입 안에 매달려 혀를 섞었다. 반 억지로라도 조금 부푼 주은찬의 아래를 느끼며 입을 떼 말했다.
"니가 날 그 여자애로 생각해도 좋아. 더 욕심 안 부릴 테니까, 한번만 하게 해줘."
눈을 가리고 있는 손을 뗄 용기는 없었지만 최대한의 용기를 내어 주은찬에게 말했다. 정말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은 나도 버틸 힘이 없었으므로 마지막으로 한 번 안겨보고 싶었다. 사랑의 결실은 그것이라고, 어떤 이들은 말했으니까. 나는 내 반쪽짜리 사랑의 결실이라도 얻고 싶었다. 억지로라도, 니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애원을 해도 움직이지 않는 손에 나는 주은찬의 손을 끌어 몸에 대었고 멈칫하던 손을 더 단단히 몸에 옮겨 붙인 후에야 녀석의 손은 움직였다.
나는 주은찬에게 안기면서도 녀석의 위에 있는 내가 신경쓰일까 밭은 숨소리하나 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행복했다. 아마도. 느껴질 듯 느껴지지 않는 애매한 뜨거움이 몸 안에 퍼지고 나서야 나는 소리내어 울었다. 내 자신이 너무 안쓰러웠다. 영원히 누군가의 첫 번째일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여럿을 바란 것도 아니었는데. 왜 나는. 나만. 나는 이런 짓을 해가면서도 얻을 수 없는 사랑에 결국 손을 들었다. 나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겨우 여기까지라는 것을 뼛속 깊이 새겨야 했다.
"제발, 제발 울지마…, 가람아"
주은찬은 내 손아래 가려진 눈을 떼지 않고 울었다. 왜 울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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