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굴레차!/은찬가람 | Posted by 윤새벽 2015. 1. 21. 18:55

[은찬가람/찬가람] Second

 사랑 같은 건, 바라지 않았다.

 

 

 

"어서 자라 내 자릴 대신 하렴"

 

"무술을 하지 못하는 몸으로 만드는 건 쉽지"

 

 

 

 애초에,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지 않는 지도 오래였다. 나는 내가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자리를 대신할 대용으로 태어난 존재, 굳이 사랑을 갈구하며 살아갈 의무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사랑이란 건, 절대적으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남자를 좋아했다. 아니, 좋아한다. 우습게도, 내 첫사랑은 나를 죽이려한 나의 아빠였고, 두 번째 사랑은 늘 같은 길로 등교를 하던-이름 밖에 모르는- 어떤 고등학생 형이었다. 처음부터,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우그러질 마음이었으므로 나는 딱히 내 감정을 밖으로 내 놓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그렇게 손가락질을 받아야만 하는 일인지는 꿈에도 몰랐었다. 나의 첫 시작은 남자였고, 두 번째도 남자였으므로 태생적으로 남자를 좋아하는 나는 동성을 좋아한다는 의미가 그렇게도 혐오스러운 것인지를 중학교쯤이 되어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로 깨우쳤다. 그리고…. 우습지만,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새로운 사랑은 찾아왔다. 정말 우습지도 않은 사랑이었다.

 

 

 

"장보러 가? 같이 갈래?"

 

"내가 도와줄게. 같이 하자."

 

 

 

 내 세 번째 사랑은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또래의 남자아이였고 나는 늘 그랬듯 그 마음을 숨기려했다. 아니, 내 사랑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난 후에는 숨겨야만 했다. 하지만 그 녀석은 지겹도록 다정했고 질릴만큼 친절했다. 아무리 밀어내려 애를 써도 녀석은 벌려놓은 거리보다 더 가까이 다가와 내 진을 빼 놓았고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으려 애를 써도 늘 한 발 앞서 친절을 베풀어 두었다. 어쩌다 잠깐 스친 모습을 보고 두근거리던 옛날과는 다르게 매일을, 매 시간을 마주치며 부대껴야 하는 녀석에겐 마음을 멀리하고 싶어도 더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내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녀석은 사람을 읽는데 정통한 인간이었고 결국은….

 

 

 

"청가람. 너 나 좋아해?"

 

 

 

 라고 물어왔다. 유난스럽게도 빠른 눈치로 내가 애써 감춰온 사실을 한 번에 들춰낸 녀석은 녀석의 말로 잔뜩 얼어버린 내 표정을 샅샅이 읽어대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란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데 녀석은 그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어대며 어떤 말을 해주어야 내가 상처받지 않을까 따위를 궁리하고 있었었다. 내가 그리도 오랫동안 삭혀온 일들을 너무도 쉽게, 한 순간에 무너뜨린 녀석은 내 울 것만 같은 표정에도 내 마음을 부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미안해, 가람아. 나는 남자한텐 관심이 없어서."

 

"그리고…, 이미 여자친구도 있는 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녀석은 나와는 다르게 뼛속까지 이성을 좋아하는 인간이었다. 영원한 평행선. 절대로 맞닿을 수 없는 그 선위에 너와 나는 놓여 살고 있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나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과 사실을 내 귀로 직접 듣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울었다. 죄스러워 차마 소리조차 낼 수 없는 울음이었다.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땅바닥을 잔뜩 적시는 것을 보며 나는 녀석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내 사랑을 한 번도 잡아본 적 없는 나였으나 그 녀석은, 그 녀석만은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너와 함께라면,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한데. 나는 녀석을 부여잡고 울며 말했다. 니가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어. 지금 니 곁에 누가 있든 나는 버틸테니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애정만을 주면 안 돼?

 

 

 

"날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 주은찬. 사귄다거나 그런 거창한 건 바라지도 않아. 그냥,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나는 그렇게 울며 말했으나 차마 녀석의 얼굴조차 마주하지 못했다. 녀석의 눈이 어렸을 때 보았던 경멸스런 눈을 하고 있을까 무서웠다. 나로서는 나의 세상이 뒤집힐 만한 일을 한 것이었으나 그 결과가 좋을거라곤 단정지을 수 없었기에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그리도 두려웠다. 그에 녀석은 낮게 한숨을 쉬었고 발끝만 바라보며 우는 내 얼굴을 들어올려 눈물을 닦아내 주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놀라 심장이 쿵쾅대었는데, 녀석은 그런 날 보며 노력해 보겠다 말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 후엔 눈물이 그친 대신 한참이나 딸꾹질을 해 댔던 것 같다.

 

 그 뒤론, 제법 관심을 받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녀석은 늘 그랬던 것처럼 지독히도 다정하고 늘 그렇듯 친절했지만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가끔 수고했다며 내 머릴 쓰다듬어주거나 잘 자라며 품에 안아주거나 아주 가끔, 내가 가라앉을 때면 이마에 입을 대어주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처음 받아보는 사랑이 담긴 행위들이었으므로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가끔, 아주 가끔 백건 녀석이 주은찬에게 "어디까지 갔냐?" 따위를 물으면 슬며시 자리를 피하곤 했지만 나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오늘 장보러 갈 거야? 같이 가, 그럼"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따라오던가."

 

 

 

 오래간만에 장을 보러 가는 길, 나는 주은찬과 함께였고 그 녀석과 함께 라는 것만으로도 나는 들떠 있었다. 함께 물건을 고르고, 장본 것들이 손에 가득하기 먼저 짐을 들어주고. 이건 어때? 난 저게 더 좋아.라는 단란한 시간에 나는 내내 가슴이 설레어 애써 버티던 마음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쌀쌀한 날씨에 발갛게 달아오른 손에 입김을 불어가며 손을 녹이는데 녀석은 그것을 보곤 빈 손을 잡아 제 옷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나는 주은찬의 손에 잡힌 내 손이 너무도 황송하여 입술만 잘근거렸고 귀 끝까지 달아오르는 기분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조금, 아주 조그만 욕심이 피어올랐다.

 

 

 

"주은찬"

 

"응?"

 

 

 

 나는 처음으로 주은찬의 입에 입술을 대어보았고, 이것은 나 스스로를 뒤흔드는 일이었다. 걷는 사람조차 없는 작은 골목, 그동안 제대로 마주보지도 못하던 네게로 고갤 돌려 입술을 대는 나. 늘 이렇다한 표현이 없던 나였기에 입술을 대는 내 행동으로 동그랗게 놀란 녀석의 눈은 제법 볼만했다. 찬바람에 바짝 마른 두 입술은 서로 닿는다 해서 엄청 대단한 느낌을 내지는 않았으나 사랑을 확인하는 곳이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감에 젖어있었다.

 

 

 

"은찬이 너…, 뭐, 뭐하는 거야?"

 

 

 

 그 행복감은 단 1분도 가지 앉았지만. 나는 내지르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고, 이내 내리쳐진 뺨은 피가 몰려 얼얼해졌다. 그 순간에도 나는 녀석이 조금이라도 덜 곤란하길 바라며 잡고 있던 손을 빼내었지만 그 여자애는 날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넌 뭔데 내 남자친구에게 그러냐며 마구 때려댔다. 그래, 차라리 내가 녀석에게 입을 맞추었기에 망정이었지. 나는 화끈거리는 볼을 느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에 안 그래도 놀란 눈을 하고 있던 주은찬은 입이 쩍 벌어지며 여자애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 여자애에게 맞았다고 해서 화가 난다거나 열이 피어오르는 건 아니었다. 조용히 넘어가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지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내가 주은찬에게 폐가 된 것 같아 미안할 뿐이었다.

 

 

 

"너 게이야? 왜 여친도 있는 남자한테 찝적대느냔 말야!"

 

"나비야, 그런거 아냐. 니가 생각하는 그런게 아냐. 진정해봐"

 

"진정은 무슨! 너한테 입맞췄잖아! 다 봤단 말야. 내 남자친구한테 왜 그래!"

 

"일단, 일단 이리와"

 

 

 

 여자애는 결국 주은찬에게 끌려갔다. 나는 주은찬의 붉은 머리칼 한올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바람을 피는 상황이었다면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얜 너보다 날 더 좋아하니 넌 그냥 깨끗이 헤어져 달라고 소리치며 아침드라마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머리채라도 쥘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자격조차 없었다. 나는 거절하는 주은찬을 붙잡고 붙잡아 애정을 달라 갈구한 걸리적거리는 애일뿐이었고 주은찬은 그 성격에 맞추어 착한 척을 조금 한 것뿐이었으니까. 나는 작게 한 숨을 내쉬며 길을 걸었다. 니가 그 여자애한테 갔더라도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올 거란 확신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나는 그것조차 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왜…, 나만 이래야 되는데."

 

 

 

 문득, 참을 수 없이 서러워졌다.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가지고 싶어한 것은 많았으나 가져본 것이 없었다. 유일하게 같은 동족이라 생각했던 아버지의 사랑도, 겨우 붙들어 놓고 있던 주은찬의 손도. 질투를 하고 싶었다. 네 옆에 그 여자애랑 헤어지면 안 되겠냐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다. "내 남자친구"에게 왜 그러냐는 말이 너무도 부러웠다. 사랑받고 싶었다.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머리를 쓸어주다가도 부족하다 투정을 부리면 깊은 입맞춤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것은 그저 네가 불쌍함에 주는 애정을 조금 받는 것뿐이었고 더 이상을 바래서도 안 됐다. 또 눈물이 샜다. 그 와중에도 나는 내 눈가를 닦아주던 네가 생각났다. 나도 이렇게나 널 좋아하는데.

 

 

 

 왜? 도대체 왜?

 

 

 

 그제야 겨우 억눌렀던 욕심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 것 참아왔을 뿐이었다. 어떻게든 가질 방법은 많았다. 온전한 사랑을 받고 싶어 얌전한 척을 했을 뿐. 어차피, 지금 받는 손길도 분에 넘치는 것이었다. 지금의 관계를 망친다고 해서 내가 딱히 잃을 것은 없었다. 얼마 길지도 않은 생이었지만 치열하게 고민하던 것이 실은 별게 아니란 생각을 하니 눈물도 금세 멎었다. 나쁠 거 없잖아. 그냥, 조금 다를 뿐이지. 분명 착하기만 한 그 녀석은 이도 별 말없이 받아줄 터였다. 머릿속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아까 그 여자애처럼 주은찬의 손에 쥐어지고 싶었다. 잠깐이라도 그 품을 나만 가지고 싶었다. 그 머릿속엔 무엇이 있던 내 눈 앞에 나만 바라보는 주은찬이 있을 생각을 하면, 그걸로 만족할 것 같았다.

 

 

 

 

 

-

 

 

 

 

 

 그렇게 주은찬은 밤이 되어야 돌아왔다. 그 여자애를 달래느라 진이 다 빠진 모양이었다. 그 시간동안 복잡하던 내 머리도 나름대로 식어 정리가 되었다. 나는 들어오는 주은찬에게 부러 눈을 맞추지 않았지만 그 녀석은 날 끌고 방으로 데려왔다. 불을 키곤 얼굴을 잡아 이리저리 살피는 너를 보며 나는 오는 길에 일었던 충동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억지로 눌러대었다. 너는 아직 옅게 붉은 빛이 도는 뺨을 쓸며 미안하다 말했고 팔을 걷어 멍이라도 든 곳은 없냐며 꼼꼼히도 살펴 대었다. 니가 왜. 왜 니가 미안해. 나는 그저 입술을 꽉 깨물곤 시선을 돌렸다. 쓸데없이 착한 것이 싫었다. 그 친절함에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하게 만드는 녀석이 지긋지긋했다. 이렇게 영원히 녀석에게서 헤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더 다친 데는 없는 거지? 벌써 얼굴 텄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이 튼 것은 오는 길 눈물을 흘려댄 탓에 부르튼 것일 게 분명했으니. 주은찬은 연신 내 볼을 쓸어대며 날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보지 마, 제발. 그 애틋한 눈빛 위로 머릿속에서 애써 지워낸 주은찬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미안해, 가람아. 나는 남자한텐 관심이 없어서.' 나는 입술을 꽉 물고는 내 앞에 있는 주은찬을 밀어뜨렸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주은찬,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나는 당황하고 있는 주은찬의 허리 위로 올라타 두 손으로 놀란 그 눈을 가리고 입을 맞추었다. 이미 벌어져 있는 입술 틈새로 혀를 밀어 넣어 어설프지만 최선을 다해 키스했다. 당황한 것도 잠시 능숙하게 따라오는 그에 나는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쓸데없는 배려. 나는 그것에 더욱 죽을 것 같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모질게 떼어내지. 두 번 다시 너를 넘볼 수 없도록. 나를 떼어내려는 손에 깍지를 껴 맞잡고 내 엉덩이 아래 닿아있는 주은찬의 위에서 허리를 움직였다. 주은찬은 그저 움찔댔고 나는 나대로 처음 닿는 그 입 안에 매달려 혀를 섞었다. 반 억지로라도 조금 부푼 주은찬의 아래를 느끼며 입을 떼 말했다.

 

 

 

"니가 날 그 여자애로 생각해도 좋아. 더 욕심 안 부릴 테니까, 한번만 하게 해줘."

 

 

 

 눈을 가리고 있는 손을 뗄 용기는 없었지만 최대한의 용기를 내어 주은찬에게 말했다. 정말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은 나도 버틸 힘이 없었으므로 마지막으로 한 번 안겨보고 싶었다. 사랑의 결실은 그것이라고, 어떤 이들은 말했으니까. 나는 내 반쪽짜리 사랑의 결실이라도 얻고 싶었다. 억지로라도, 니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애원을 해도 움직이지 않는 손에 나는 주은찬의 손을 끌어 몸에 대었고 멈칫하던 손을 더 단단히 몸에 옮겨 붙인 후에야 녀석의 손은 움직였다.

 

 나는 주은찬에게 안기면서도 녀석의 위에 있는 내가 신경쓰일까 밭은 숨소리하나 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행복했다. 아마도. 느껴질 듯 느껴지지 않는 애매한 뜨거움이 몸 안에 퍼지고 나서야 나는 소리내어 울었다. 내 자신이 너무 안쓰러웠다. 영원히 누군가의 첫 번째일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여럿을 바란 것도 아니었는데. 왜 나는. 나만. 나는 이런 짓을 해가면서도 얻을 수 없는 사랑에 결국 손을 들었다. 나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겨우 여기까지라는 것을 뼛속 깊이 새겨야 했다.

 

 

 

"제발, 제발 울지마…, 가람아"

 

 

 

 주은찬은 내 손아래 가려진 눈을 떼지 않고 울었다. 왜 울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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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굴레차!/은찬가람 | Posted by 윤새벽 2015. 1. 18. 17:37

[은찬가람/찬가람] 이틀

http://lattegreen.tistory.com/6

위 글과 이어지는 듯 글입니다만 딱히 읽지 않아도 이 편을 이해하는데 무리는 없습니다.

 

 

 

 

 눈은 갑작스레 뜨여졌다. 날씨가 안 좋나. 평소 같으면 햇볕이 쏟아져 가서 커튼 좀 치리라고 투닥이다 일어났을 텐데. 여전히 반쯤 잠에 취해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이 전과 다르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주은찬은 나갔나? 깨우고 나가야 정상인데. 급한 일이라도 있었나. 느릿이 눈을 깜박이며 머리를 굴리다 넓고 허한 공간이 몸으로 느껴져 헤메던 꿈 속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맞다, 나 주은찬이랑 헤어졌었지. 팔등을 눈 위에 올리고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일년이란 시간이 그렇게 쉽게 잊힐 리 없다는 것을 어렴풋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 것이 피부로 와 닿으니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더 서늘했다. 서늘한 몸에 이불을 끌어 당겨 덮곤 보일러조절기를 보았다. 깜빡이는게, 기름도 떨어진 것 같았다. 너도 나도 부족하구나. 우습지도 않은 생각을 하다가 주변을 더듬어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날도 어둑한 것이 아직도 새벽인건지 날이 흐린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귀찮게."

 

 

 

 아무리 전원버튼을 눌러도 켜지지 않는 휴대폰은 배터리마저 나가있었다. 어제 밤새 녹음된 파일을 재생시켜두고 잠든 탓인 것 같았다. 일어나기 귀찮은데…. 할 것도 없는데 그대로 다시 잠이나 잘까 싶었지만 결국 몸을 일으켜 엉금엉금 대며 충전기가 꽂힌 곳으로 기어갔다. 집엔 팔이 누워서 팔이 닿는 곳에 충전기도 휴대폰도 있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 머리를 털어냈다. 다 쓴 배터리를 충전기에 꽂아 넣고 새 배터리를 넣어 휴대폰을 켰다. 얼핏 내다본 밖은 그저 흐린 듯 했다. 날씨 한 번 구리네. 휴대폰이 켜지는 시간은 참 길었다. 나는 그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휴대폰이 진작에 켜졌으나 켜진 것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몇 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부재중 전화도, 문자도, 카카오톡도. 그 어떤 것도 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아직도 휴대폰이 켜지는 중이구나, 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유난스러울 만큼 배터리를 가는 때에만 연락을 해대는 주은찬 덕에 나는 휴대폰이 모두 켜졌음을 휴대폰의 진동으로 알곤 했다. 그리고 그 녀석과 헤어진 지금, 어떠한 연락도 없는 휴대폰 덕분에 내가 주은찬과 진정으로 헤어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제야 설움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진짜로 헤어졌다. 나를 그렇게 좋아하던 녀석과,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녀석과. 나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휴대폰을 품에 안고 엉엉 울었다. 이제, 이 침묵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서러웠다. 집엔 잘 들어갔냐고 문자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근처 가게에 나간다고만 해도 득달같이 전화해서 조심하라던 너였는데. 눈물이 흐르는 뺨이 너무 뜨거웠다. 나의 뜨거움은 오로지 너였는데, 나는 너를 잃고도 이 뜨거움마저 잃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나쁜, 윽, 새끼…. 연락도 없냐, 흑, 나쁜 놈"

 

 

 

 자다가 일어나 쏟는 눈물에 목소리는 볼품없이 갈라져 있었다. 거기다 중간중간 울컥이며 새는 울음소리는 내가 들어도 우스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텅 빈 거실에선 울지 말라는 네 목소리 같은 건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더욱 꽉 쥐었다. 앞으로 이 허전함을, 이 텅 빈 듯 한 기분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이           틀

 

 

 

 

 

 

 한참을 울고서야 시간을 확인했다. 여전히 아무런 알람이 없는 휴대폰은 11:47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기도 엄청 잤네. 하지만 많이 잔 탓인지 여전히 늘어지는 몸에 이불 속 안으로 들어가려다 한 곳에 고이 접어둔 붉은 색 목도리가 보였다. 나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목도리를 집어 들어 품에 안고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 잠을 자면서 잠버릇이 고약한 것은 있었어도 잠이 들기 위한 잠버릇은 없었는데. 주은찬과 함께 살기 전인 1년 전에는. 나는 목도리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목도리 사이에 스며있던 공기가 새어 올라오며 그 녀석 냄새가 났다. 같이 살지 못했다면 절대 익힐 수 없었을 체향. 그리고 그녀석의 집에 처음 발을 들일 때 맡았던 그 향. 나는 몸을 둥그렇게 말고는 목도리에 코를 박았다.

 

 

 

"주은찬 냄새난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길 반복했다. 먼저 헤어지자 말하고 이러는 꼴이 퍽 우스웠지만 이 그리운 향은 계속해서 나를 끌어대었다. 순전히 그 녀석 때문에 생긴 잠버릇은 목도리를 끌어안고 있으니 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그냥 더 잘까….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오른쪽으로 돌아누운 덕에 눌려있는 팔이 저린 것도 같았다. 나는 그에도 피식, 웃음이 샜다. 주은찬 안고 자는 기분이야.

 

 

 

'아이씨, 야! 우리 자리 바꿔'

 

'그러자. 맨날 이쪽으로 돌아누워서 자니까 팔 저려'

 

 

 

 꿈을 꿨다. 주은찬과 함께 하던 어느 날이었다. 우린 매일을 붙어살아도 이상하게 잠이 들 때만큼은 꼭 서로를 끌어안고 잤는데, 늘 서로가 같은 위치에 있다 보니 늘 같은 쪽 팔만 저려서 결국은 서로 자리를 바꿔 자기로 했던 날이었다. 편하게 바로 누워 자면 위치 같은 건 바꾸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안지 않고 자기는 싫어 자다 일어나 위치를 바꿨던, 우리가 서로를 그렇게도 사랑했던 날. 하지만 그도 늘 같은 방향으로 자는 버릇 때문에 등을 돌리고 자버려 다시 자리를 바꾸어 잠이 들었지만. 또 눈이 저절로 뜨였다. 다시 뜨여진 눈앞엔 웃으며 날 바라보고 있는 주은찬이 아닌 붉은 목도리뿐이었다. 나는 그저 한 숨을 내쉬며 시간을 확인 했다. 13:21. 그새 또 잠들었나 보네. 몸을 일으키며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쓸어댔다. 일단은 기름부터 시켜야 할 것 같았다.

 

 

 

 

 

-

 

 

 

 

 

 방 안에 기름을 넣고는 일단 밖으로 나왔다. 방 안에 있어봤자 계속 슬퍼질 것만 같아 밖을 한 없이 걸었다. 목도리를 두고 와 목 새로 바람이 쉼 없이 새 들었지만 조금 남은 네 향을 바깥에 모두 날려버리긴 싫었다. 휴대폰 요금제를 바꿀까, 공유기를 살까 이런 저런 고민을 했지만 기름 값을 낸 후 생각보다 타격이 커서 결국 도서관에 갔다. 어릴 때 독서프로그램이니 뭐니 하면서 다녔던 이후론 가본 적이 없었으나 어떻게든 시간을 보낼 것들이 필요했다. 뭐 증명사진이라도 필요할까 했으나 주민등록증만 있으면 된다는 말에 냉큼 이용증을 만들어서 서고로 향했다. 아쉽게도 달큰한 옛날 책의 냄새는 없었다. 꽤나 좋아하는 냄새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슬금슬금 책을 둘러보았지만 원채 책을 멀리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적당한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베스트셀러에서 한권, 그냥 책표지가 예쁜 것 하나, 해서 두 권을 빌렸다. 책을 읽을까는 모르겠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보일러부터 켰다. 밖의 날씨는 비슷비슷 했던 것 같은데 코 끝이 시큰대는 탓이었다. 이불 속으로 꼬물대며 기어들어가 빌려온 책을 펼쳐 들었다. 곁엔 빨간 목도리가 있는 채였다. 얼마 길지 않은 글들이 모인 산문집이라 읽기는 편했다. 팔랑대며 의미 없이 페이지를 넘기며 글을 읽어 내렸다. 슬슬, 지루해질 즈음이었다.

 

 

 

「 당신 혼자 며칠을 더 머물러야 했다. 당신이 나에게 신던 신발을 버리고 갈거냐 물었다.

   가방을 싸면서 낡은 신발을 휴지통에 버리려 하는데 당신이 말했다.

 

   "거기 한쪽에 두고 가. 그냥 내가 바라보게."

 

   어쩌면 이토록 오랜 시간이지난 후에야 그 말이 생각나는 걸까. 그 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걸까. 단지, 우리가 며칠 머물

   던 호텔에 건너편 쪽에 앉아있을 뿐인데. 」

 

 

 

 나는 더 이상 그 책을 읽을 수 없어 책을 덮어버렸다.

 

 

 

 

 

*

마지막에 인용된 책의 내용은 이병률님의「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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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굴레차!/은찬가람 | Posted by 윤새벽 2015. 1. 18. 17:26

[은찬가람/찬가람] 하루

 캐리어에는 생각보다 금방 짐이 찼다. 캐리어가 터무니없이 작은 탓은 아니었다. 가져갈 짐이 생각보다 없었던 거지. 아무리 옷가지는 미리 보내두었다지만 내가 이 집에 일여년을 살았던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나 혼자만의 짐은 적었다. 요 며칠 입었던 옷과 양치도구, 같은 것으로 맞추었지만 좀 더 순한 스킨과 로션, 슬리퍼 정도. 나는 캐리어에 차곡차곡 담아지는 내 짐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 내가 여기 살았던 것이 맞나. 잠깐 여행을 왔던 건 아니지? 나는 마지막으로 크지도 않은 방을 둘러보며 빠진 것은 없는지 다시 살폈다. 녀석은 볕이 잘 드는 창을 등지고선 침대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짐은 그게 다야?"

 

 

 

 다시 캐리어가 있는 쪽으로 돌아와 말짱한 지퍼를 만지작대고 있으니 녀석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녀석에게서 고개를 돌려 지퍼를 주욱, 닫았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이 캐리어는 아마 1박 2일 여행을 가자며 호들갑을 떨다가 무작정 사들였던 것일 것이었다. 나는 일어서 캐리어를 집어 들었다. 돌돌돌, 결국 여행을 가지 못해 한 번도 밖에서 끌어본 적이 없는 캐리어 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숨소리마저 부담스러울 정도로 컸던 이 공간을 매꿔주는 것이 감사할 정도로 바퀴는 돌돌돌 소리를 냈다. 현관에 서서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었다가, 네가 신발이 망가진다며 잔소리를 해댈까봐 손가락을 밀어 넣어 빳빳이 펴내었다.

 

 

 

"그럼, 나 갈게."

 

 

 

 구겨진 신발을 펴느라 굽혔던 허리를 펴 녀석을 마주보았다. 이제 정말 갈 시간이었다. 현관에 선 나와 여전히 집 안에 있는 너. 나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기분에 담담했다. 녀석 또한 늘 그랬던 것처럼 웃어주었고, 나는 웃는 녀석을 보며 웃어줄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두어번 숨소리가 오간 뒤에 나는 몸을 틀어 나가려 했으나 녀석은 아, 잠시만.하는 말로 날 불러 세웠다. 나는 반쯤 돌아선 어정쩡한 자세로 녀석을 바라보았고 녀석은 자신의 머리색마냥 붉은 목도리를 가져와선 내 목에 둘둘 감아주었다.

 

 

 

"감기 걸릴라. 오늘 춥데"

 

 

 

 나는 바람 샐 구멍 하나 없이 목도리를 둘러주는 녀석의 손길을 받으며 가만히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뭐, 유난스레 무엇인가가 바뀔 일도 아닌 것 같지만. 별 거 아닌 일이었지만 목도리를 매어주는 손은 유난히 더뎠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보던 시선을 거두곤 목도리의 끝머리까지 세심하게 정돈해주고 있는 녀석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은찬, 넌 이 빨간 목도리가 어떤 건지 기억해? 뭐, 이건 좀 새삼스런 감정이긴 했다. 왜냐면, 이건 내가 이 녀석에게 처음 주었던 선물이었으니까.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주었던 선물. 그 선물은 결국 나에게로 돌아와 단단히 묶였다. 계속 미적거리던 녀석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다 됐어,라고 말했고, 나는 고맙다 대꾸하고 돌아 나왔다. 엄청 크거나 그리 특별한 문도 아니었다. 그냥, 다른 집과 비슷한 그저그런 문이었는데. 이 문을 기준으로 내 세상은 크게 변했다.

 

 나는, 오늘 주은찬과 헤어졌다.

 

 

 

 

 

 

 

하       루

 

 

 

 

 

 

 

 

 나는 캐리어를 끌고 오느라 차가워진 손을 불어대며 집으로 들어섰다. 흔한 쇼파, TV하나 없는 텅 빈 집. 나는 신발을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현관에 기대 주르륵 내려앉았다. 다리가 풀린 것은 아니었으나 힘은 빠졌다. 집 안이라기엔 쌔한 공기에선 옅은 먼지내음이 났다. 기운 없는데. 아마 청소부터 해야 하지 싶었다. 그 뒤엔 가져온 짐을 정리하고, 근처 마트에 가서 장도 좀 봐 오고. 아, 냉장고에서 냄새는 안 나려나 몰라. 나는 멍하니 거실 한 켠을 차지한 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 전에 보일러부터 좀 돌릴까. 나는 깊이 숨을 내쉬며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거실로 들어서는 짧은 새에 붉은 목도리가 풀려 질질 끌렸다. 먼지 묻을 텐데. 나는 흘러내린 목도리를 다시 목에 감았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겨준 그리 크지 않은 집. 그나마도 녀석과 붙어살게 되면서 방치해두었던 집은 집의 기분이 전혀 나지 않았다. 거기다 사람도, 사람의 흔적도 없으니….

 

 

 

"아…, 허하다."

 

 

 

 나는 당장이라도 침대에 눕고 싶었으나 온통 먼지투성이일 집안을 생각해 창문을 열고 청소도구와 걸레를 찾았다. 방청소는 일단 두고 거실만이라도 청소를 해서 거실에서 잘 생각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거실은 쓸고, 닦아내기만 하면 됐다. 어려운 것도, 시간이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먼지를 쓸어내고 닦아내는 손은 더디기 짝이 없었다. 주은찬, 목도리를 매주던 그 녀석의 손이 미적거렸던 것도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이건, 매우 묘한 감정이었다. 서로 감정이 상하도록 싸운 것도, 둘 중 하나가 바람을 핀 것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다른 사람들처럼 한 순간 끓어오르던 감정이 식고 미적지근해진 감정을 어찌할 줄 몰라 노력해 보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붙잡고 있기엔 아무 느낌이 없지만 놓아버리기엔 시릴 것 같은, 딱 그런 미적지근한 온도의 감정. 나는 처음이었다 친더라도 녀석은 그런 경험이 두어번 더 있었지만 어찌 대처할 바를 몰랐다. 가족이라기엔 멀고 연인이라기엔 좀 더 익숙한, 그런 관계는 서로를 답답하게 만들기만 했고 나는 좀 떨어져 지내보자고 말했다. 애매한 말이긴 하지. 좀 떨어져 지내보자. 떨어져 지냈는데 아무렇지 않으면 그냥 그대로 쭉, 떨어져 있다가 괜찮은 사람이 생기면 또 사귀어보고, 아니면 혼자 하루하루를 보내고. 좀 떨어져 봤는데 뭔가 혼자는 도저히 아닌 것 같으면 또 붙어서 지내보고. 웃음이 났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둘의 상황에서 가장 그럴듯한 답변이었으나 이조차 별다른 답이 없는 방법인 게 분명했다.

 

 

 

"전화해볼까…."

 

 

 

 걸레질을 하다 말고 멈추어서 딴생각을 하던 난 주머니에 들어있는 휴대폰이 문득 생각났으나 그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하는 것도 우스운 생각인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평소 아니, 두시간 전만 해도 집에 도착했으니 걱정하지 말란 말을 할 사이었지만 지금은 딱히 그런 사이도 아닌 것 같았다. 내 쪽에서 먼저 제안한 방법이었지만, 참으로 개 같은 방법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연애도 해본 사람이 해본다고, 조금만 더 애매한 상태로 지냈다면 주은찬이 꽤 그럴듯한 방법을 내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항상 한 발 앞의 일을 생각해뒀던 녀석이었으니까. 거실을 다 훔쳐낸 걸레를 곁에 두곤 그냥 드러누워 버렸다. 눈에 띠는 건 형광등뿐이었다. 불은 들어오던가. 그런 생각을 하다 슬금슬금 몸을 타고 오르는 한기에 보일러부터 돌리곤 걸레를 빨았다. 당분간, 청소를 다 마치더라도 거실에서 자야 할 것만 같다. 침대는 좁던 넓던, 일 여년간 녀석과 함께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오를 것 같으니까.

 

 

 

 

 

-

 

 

 

 

 ​저녁은 김치찌개와 계란말이였다. 앞으로 집에서 살면서 요리를 해 먹으려면 이것저것이 필요할 터였지만 오늘은 귀찮았다. 힘도 없었고. 시중에 파는 김치를 사먹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이거저거 사와서 하긴 부담스러웠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음식은 싫었다. 결국 선택지는 파는 김치로 간단히 찌개를 끓이는 것뿐이었고 장을 보며 녀석이 좋아하는 참치를 사 넣을까 하다가 어설픈 오기로 햄을 사왔다. 그 치졸한 오기에 웃으며 오랜만에 햄이 가득한 김치찌개와 함께 밥을 먹었다. 참치가 잔뜩 들어간 계란말이는 혼자 먹기에 양이 너무 많아 남겼지만.

 

 평소 자던 시간보다는 이르지만, 설거지를 마치고 나니 마땅히 할 거시 없어 자리를 깔고 누웠다. 오랜 시간 장롱 안에 두었던 이불에선 퀴퀴한 냄새가 조금 피어올랐다. 그 냄새를 애써 무시하며 가만히 숨을 내쉬는 집 안은 한 없이 조용했다. 집안에 소리가 날 기구는커녕 가구도 얼마 없었고 딱히 연락 올 가족도 친구도 없었으며 하던 일도 잠시 쉬고 있었기 때문에 할 일도 없었다. 그저 있는 것이라곤 휴대폰뿐인데, 그마저도 데이터 용량이 크지 않아서 뭘 하기에도 애매했다. 혼자가 되니 참 할 것 없는 인생이었다.

 

 

 

"노래 다운 받아 둔 게 있었나"

 

 

 

 팔을 곧게 들어 휴대폰을 어플을 뒤적였다. 간만에 이곳저곳을 쓸고 닦은 덕에 나름대로 팔이 저린 탓도 있었다. 음악재생 어플을 켜 몇 개 있지도 않은 노래를 재생시켰다. 하나하나 세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한 열 개쯤 되는 것 같았다. 하나당 4분을 잡아도 40분이면 또 지루해지겠지만, 그나마 이 걸로라도 이 적막감을 떨쳐낸다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모래를 들으며 내일은 서비스센터가 열자마자 데이터용량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 공유기를 사는 게 빠를까. 여유가 된다면 중고든 작은 거든 TV도 하나 사고. 좀 움직이려면 일도 다시 구해야 할테고. 어느새 노래가 바뀌어 꽤 헤비하게 귓전을 울리는 노래를 배경삼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급작스레 멈춘 노래에 배터리라도 없나 싶어 휴대폰을 집어들었는데,

 

 

 

[가람아아. 이거 꼭 해야 해?]

 

 

 

 주은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안 오려고 그런게 아니라 최부장님이 날 안 놔준거라니까? 너도 봤잖아, 가람아. 그 성질 더럽게 생긴 최부…, 악!]

 

 

 

 ​피식, 웃음이 샜다. 몇 번째의 기념일이었던가, 집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다 지쳐 잠든 날 밤-정확히 말하자면 그 다음날 밤이지만-, 녀석은 술이 머리끝까지 취해 이리저리 부딪쳐 뭉개진 케익을 들고 방 바닥에 쓰러졌었다. 그 꼴이 얼마나 미우면서도 우습던지. 겨우 술자리에게 졌다는 분통함에 대답 한마디 해주지 않으려 했지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뭐든 다 하겠다는 주은찬의 말에 각서라도 써야 믿겠다는 난리를 부리고 녹음한 파일이 여즉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아, 알았어, 알았어. 아파! 흠, 흠. 각서. 나 주은찬은 두 번 다시 청가람을 혼자두면 청가람이 뭘 시키든 군말없이 죄값을 치르겠습니다.]

 

 

 

 나름대로 또박또박 말을 내뱉는 주은찬의 목소리는 거기서 끝이 났다. 곧바로 다른 노래로 바뀌는 플레이어에 나도 모르게 되감기 버튼을 눌러 그녀석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또 다시 한 번…. 이상했다. 늘 듣던 목소리이고 바로 몇 시간 전에도 들었던 목소리였지만 너무 그리운 목소리였다. 가까이에서 몇 번이고 재생되는 목소리였지만 너무 먼 목소리였다. 나는 뜨끈해지는 눈가를 팔로 가렸다. 방이 추웠다. 추워서, 보일러를 펄펄 때어대는데도 추워서 코 끝도 찡해졌다.

 

 

 

"…치른다면서…."

 

 

 

 나는 그새 외운 녀석의 대사를 읊었다. 다시 혼자두면 군말없이 죄값을 치른다면서.

 

 

 

 

 

 

 ​나는 지금 여기 혼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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