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 춥다…."
달력이 또 한 장 넘어갔다. 봄을 알리는 3월을 보낸 지금, 새파랗게 모든 것을 다 얼렸던 겨울이 가고 조금씩 따뜻한 기운이 올라 얼어붙어 있던 길들이 피어나고 있다. 다른 어느 곳보다 춥지만, 그 어떤 곳보다도 날 행복하게 하는 이곳 중앙도 다른 곳과 다를 것 없이 오는 길의 가로수에 꽃잎들이 맺혀가고 있다. 나는 그 피어나는 잎들을 바라보며 웃다 몸을 움츠려 양 팔을 감쌌다. 봄이 와 꽃마저 핀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여전히 쌀쌀한 바람이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나는 너를 기다리며 싸늘해지는 팔뚝을 문질러대다 손을 불어대며 나무아래 흐드러져있는 꽃잎들을 그러모았다.
벚꽃. 흰색 벚꽃잎과 분홍빛 벚꽃잎이 한 곳으로 모아지며 섞여간다. 진한 분홍색보다는 조금 더 연한 색인가. 나는 그것들을 두 손 가득 담아올리며 너를 떠올렸다. 진한 분홍색보다는 조금 더 연한 색의, 네 뺨을 떠올렸다. '네 볼이 꽃잎 색처럼 물들었다.'하는 조금 우습고 간질한 표현을 떠올리게 하는 네 양 뺨, 그 아래 새침하게 꽉 다물려 있다가도 오물대며 움직이는 네 입. 아, 입술도 분홍빛이다. 제일 진한 이 벚꽃잎의 색쯤 되려나? 나는 네 입술에 가까이 다가가기 전을 떠올리며 그 색에 가까운 꽃잎을 찾으려 노력했다. 아아, 그러고보니 네 눈은 이 벚꽃보다도 더 진한 붉은 색이었지. 눈 색은 동백꽃쯤 될까?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 모든 것이 모두 너로 이어져 있었다는 것이 새삼 우스워졌다. 너도 그럴까? 그렇다면 좋을텐데.
"뭘 바보 같이 웃고 앉아있어?"
벚꽃잎을 잔뜩 모아 담은 손을 바라보며 한참을 웃고 있을 때, 네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아, 이리 오기 전에 먼저 가 놀래 켜 주려고 했는데. 나는 난감하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온 네 머리위로 꽃잎을 조금씩 떨어뜨렸다. 너와 함께한 1년, 너와 비슷했던 키가 조금 더 자란 것이 오늘만큼 득이 되었던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갑작스런 내 행동에 눈을 질끈 감고는 내 옷자락 끝을 쥐었다. 네 머리위로 꽃 비가 흘러내렸다. 아, 예쁘다. 네가 연한 홍빛의 벚꽃잎으로 물들어 갔다. 하늘히 떨어지는 꽃잎 한장한장이 아니었더라면 자각하지 못했을, 세상이 멈춰버린 것만 같은 내 눈 앞의 장면을 나는 홀린 듯 바라보았다. 너와 다시 맞는 봄, 네 위로 떨어지는 벚꽃 그리고…. 나는 간질대는 마음으로 여전히 눈을 꽉 감고 있는 네 턱을 들어 올려 가볍게 입맞추었다. 너는 그제야 눈을 떠 뭐하는 짓이냐 날 노려보았지만 난 그저 웃으며 네 눈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입을 맞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가람이의 눈가에 벚꽃잎이 물들었다. 나는 그 눈가에 설레어버려 입을 맞추었다. 사랑한다 속삭이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내가 내 감정을 못이겨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아 조용히 너보다 앞서 걸어나갔다.
"뭐야, 너 진짜…."
조금은 흔들리는 목소리가 내 뒤에서 투덜거렸다. 나는 시렸던 손을 주머니에 넣어 꽉 쥐곤 조용히 호흡을 골랐다. 아, 아직도 이렇게 예뻐보여서 어떡하지. 나는 눈을 꽉 감았다 떴다. 자박자박, 내 걸음에 맞춰 네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자박, 자박, 자박. 두근, 두근, 두근. 나는 네가 내게로 걸어오는 걸음에도 가슴이 떨려온다. 나는 조금 더 크게 숨을 들이쉬곤 내뱉었다. 그 사이 네가 내 곁에서 나란히 걸었다. 나와 같이 손을 양 주머니에 넣은 고는 뚱한 표정을 한 채로 내가 없는 쪽의 나무들을 보며 걸었다. 지금의 나는 그것이 마음을 제 숨기기 위한 표정임을, 알고 있다. 내가 두근거리는 만큼 두근거릴 마음을 감추려 부러 새침한 표정을 짓고, 나를 쫓는 눈길을 거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런 너에 또 웃음이 새어 입 안으로 주문을 외웠다.
날 불러라, 날 불러라, 날 불러라.
"뭐야, 너. 나 손시리단 말이야."
아, 이런 말을 상상하며 부린 주술이 아니었는데. 나는 너무 좋아서 당황하게 만든 너를 보며 웃었다. 방금까지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이 어느새 밖으로 삐져 나와있다. 네 손가락 끝도 벚꽃잎으로 물이 들어버렸다. 나는 그 손을 맞잡아 꽉 쥐곤 내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네 거짓말을 알게 해주는 따끈한 손이 나를 다시 웃게 했다. 너를 알고, 나는 웃지 않았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가는 길 마다 흐드러져 있는 벚꽃나무에 나는 기분이 더욱 더 들떠버렸고 너와 함께 손을 잡고 걷는 이 순간을 견딜 수 없어 나무 아래 벤치를 가르켰다. 가람아, 우리 조금만 쉬다 가자. 너는 그런 날 올려다 보다 그럼 그러자, 대답을 했을 뿐이었다. 가만히 앉아 꽃잎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조금, 떨어져 앉아있는 거리가 시려 나는 네 곁으로 바짝 달라붙어 앉았고 너는 또 뚱한 표정을 지으며 발 아래 꽃잎들을 툭툭 차댔다. 나는 그런 널 바라보다 여전히 주머니 안에 쥐고 있는 손을 꽉 쥐었다가 매만졌다. 조금 차이가 났던 두 손의 온도가, 어느새 비슷해져 있었다. 여전히 발장난을 치고 있는 널 바라보다 네 귓가에 내려앉은 꽃잎이 눈에 띄었다.
나는 여전히, 너를 좋아하고 있다.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고 사소한 것이었다. 너를 만나던 해의 봄,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의 주술에 벚꽃나무 가지로 몇 번이나 묶여야 했던 그날. 그날도 지금처럼 네 귓가에는 벚꽃잎 하나가 내려 앉아있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네 귓가에 내려앉은 꽃잎을 떼어내려 손을 뻗은 순간, 네가 내 눈 안으로 들어왔다. 내 손길에 움츠러든 작은 어깨, 그 덕에 함께 눈에 들어왔던 유난히 희던 목, 노을빛을 받아 꽃잎보다 붉게 달아올랐던 볼까지. 서스럼 없는 여느 남자애들처럼 지내 언제고 볼 수 있던 그 사소한 것들이 다른 기분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 꽃잎을 떼어내며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들이마신 너는 내 목을 조르고, 내 머리를 너로 가득 채워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했다.
'뭐, 뭐하는거야!'
너는 꽃잎을 잡기 위해 내 손이 닿았던 귓가가 가렵다는 듯이 긁어댔지만 네 손에 의해 발갛게 달아오른 귓가를, 나는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늘 보았던 사소한 풍경이 큰 감정으로 다가오던 순간. 나는 여전히 잡고 있던 꽃잎이 으스러지도록 꽉 쥐곤 멋쩍게 웃었다. 너는 그 길로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지만, 나는 짓이겨 손 안에 옅게 물든 꽃잎을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가람아, 그때 기억나?"
나는 네 곁에 앉은 널 바라보며 묻는다. 내 말에 바닥을 향하던 눈이 내게로 옮겨온다. 나는 그 잠시에도 또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었다. 너는 여전히 뚱한 표정을 지으며 이제는 지겹다는 듯 한 말투로 내가 할 말들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몇 번을 얘기하는 거야? 귀에 딱지 앉겠다. 작년 이맘때, 벚꽃잎 떼 주던 그날부터 나 좋아했다며! 전 같으면 온 몸이 근질대서 그런 말은 죽어도 못하겠다고 소릴 질렀을 텐데. 나는 어느새 표현이 자유로워진 널 보며 웃었다. 아아, 아직 그 뚱한 표정을 보면 한참은 남은 것 같지만. 나는 널 바라보며 대꾸한다. 응, 맞아. 그때. 네가 참을 수 없이 좋아졌던 날. 넌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말야. 넌 이제 지겹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나지도 않는 땀이 손에서 난다며 손을 잡아 빼었다. 부끄러워 죽겠다고 온 몸으로 표현하는 널 바라보며 어느새 발갛게 달아오른 네 귓가를 눈에 담는다. 다시, 가슴 한 켠이 두근거린다.
"야, 주은찬"
"응?"
두근대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을 때쯤, 네가 나를 불렀고 나는 그런 네게 대꾸하기 위해 널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발 끝을 가르킨 너는 내가 그 손가락 끝을 바라보는 것을 보곤 일어서 먼저 걷기 시작했다. 발 아래 떨어져 있던 네 주변의 꽃잎들은 네 발 아래 다소곳이 모였다. 울퉁불퉁, 하지만 꽤나 정교한 모양의 하트. 나는 또 웃음이 샌다. 나는 들뜨는 마음을 숨기지 않으며 웃어대다 혼자 멀어지는 너를 보곤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찰칵, 하는 소리에 너는 좀 더 멀어진다. 나는 네 곁으로 달려간다. 너는 달려오는 내 소리를 듣지 않으려 귀를 막고는 아, 아, 아- 소리를 내지른다. 네 손 안에 가려진 붉게 물든 귓가를 보다 귓가를 틀어막은 손을 잡아내려 맞잡는다.
"손, 잡고 걸을래."
너는 입을 꾹 다물곤 가만히 손을 내어준다. 아까와 다른 나른한 바람이 불어온다. 너와, 그런 네 손을 맞잡은 나에게로 꽃비가 쏟아진다. '손…, 잡고 걸어도 돼?'가 아닌, 말없이 손을 맞잡을 수 있는 나날들이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랑해, 가람아."
"…나도."
봄과 벚꽃과 청가람. 이렇게 또 나의 봄이 이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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