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 춥다…."

 

 

 

 

 달력이 또 한 장 넘어갔다. 봄을 알리는 3월을 보낸 지금, 새파랗게 모든 것을 다 얼렸던 겨울이 가고 조금씩 따뜻한 기운이 올라 얼어붙어 있던 길들이 피어나고 있다. 다른 어느 곳보다 춥지만, 그 어떤 곳보다도 날 행복하게 하는 이곳 중앙도 다른 곳과 다를 것 없이 오는 길의 가로수에 꽃잎들이 맺혀가고 있다. 나는 그 피어나는 잎들을 바라보며 웃다 몸을 움츠려 양 팔을 감쌌다. 봄이 와 꽃마저 핀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여전히 쌀쌀한 바람이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나는 너를 기다리며 싸늘해지는 팔뚝을 문질러대다 손을 불어대며 나무아래 흐드러져있는 꽃잎들을 그러모았다.

 

 

 벚꽃. 흰색 벚꽃잎과 분홍빛 벚꽃잎이 한 곳으로 모아지며 섞여간다. 진한 분홍색보다는 조금 더 연한 색인가. 나는 그것들을 두 손 가득 담아올리며 너를 떠올렸다. 진한 분홍색보다는 조금 더 연한 색의, 네 뺨을 떠올렸다. '네 볼이 꽃잎 색처럼 물들었다.'하는 조금 우습고 간질한 표현을 떠올리게 하는 네 양 뺨, 그 아래 새침하게 꽉 다물려 있다가도 오물대며 움직이는 네 입. 아, 입술도 분홍빛이다. 제일 진한 이 벚꽃잎의 색쯤 되려나? 나는 네 입술에 가까이 다가가기 전을 떠올리며 그 색에 가까운 꽃잎을 찾으려 노력했다. 아아, 그러고보니 네 눈은 이 벚꽃보다도 더 진한 붉은 색이었지. 눈 색은 동백꽃쯤 될까?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 모든 것이 모두 너로 이어져 있었다는 것이 새삼 우스워졌다. 너도 그럴까? 그렇다면 좋을텐데.

 

 

 

 

"뭘 바보 같이 웃고 앉아있어?"

 

 

 

 

 벚꽃잎을 잔뜩 모아 담은 손을 바라보며 한참을 웃고 있을 때, 네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아, 이리 오기 전에 먼저 가 놀래 켜 주려고 했는데. 나는 난감하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온 네 머리위로 꽃잎을 조금씩 떨어뜨렸다. 너와 함께한 1년, 너와 비슷했던 키가 조금 더 자란 것이 오늘만큼 득이 되었던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갑작스런 내 행동에 눈을 질끈 감고는 내 옷자락 끝을 쥐었다. 네 머리위로 꽃 비가 흘러내렸다. 아, 예쁘다. 네가 연한 홍빛의 벚꽃잎으로 물들어 갔다. 하늘히 떨어지는 꽃잎 한장한장이 아니었더라면 자각하지 못했을, 세상이 멈춰버린 것만 같은 내 눈 앞의 장면을 나는 홀린 듯 바라보았다. 너와 다시 맞는 봄, 네 위로 떨어지는 벚꽃 그리고…. 나는 간질대는 마음으로 여전히 눈을 꽉 감고 있는 네 턱을 들어 올려 가볍게 입맞추었다. 너는 그제야 눈을 떠 뭐하는 짓이냐 날 노려보았지만 난 그저 웃으며 네 눈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입을 맞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가람이의 눈가에 벚꽃잎이 물들었다. 나는 그 눈가에 설레어버려 입을 맞추었다. 사랑한다 속삭이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내가 내 감정을 못이겨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아 조용히 너보다 앞서 걸어나갔다.

 

 

 

 

 "뭐야, 너 진짜…."

 

 

 

 

 조금은 흔들리는 목소리가 내 뒤에서 투덜거렸다. 나는 시렸던 손을 주머니에 넣어 꽉 쥐곤 조용히 호흡을 골랐다. 아, 아직도 이렇게 예뻐보여서 어떡하지. 나는 눈을 꽉 감았다 떴다. 자박자박, 내 걸음에 맞춰 네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자박, 자박, 자박. 두근, 두근, 두근. 나는 네가 내게로 걸어오는 걸음에도 가슴이 떨려온다. 나는 조금 더 크게 숨을 들이쉬곤 내뱉었다. 그 사이 네가 내 곁에서 나란히 걸었다. 나와 같이 손을 양 주머니에 넣은 고는 뚱한 표정을 한 채로 내가 없는 쪽의 나무들을 보며 걸었다. 지금의 나는 그것이 마음을 제 숨기기 위한 표정임을, 알고 있다. 내가 두근거리는 만큼 두근거릴 마음을 감추려 부러 새침한 표정을 짓고, 나를 쫓는 눈길을 거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런 너에 또 웃음이 새어 입 안으로 주문을 외웠다.

 

 

 날 불러라, 날 불러라, 날 불러라.

 

 

 

 

"뭐야, 너. 나 손시리단 말이야."

 

 

 

 

 아, 이런 말을 상상하며 부린 주술이 아니었는데. 나는 너무 좋아서 당황하게 만든 너를 보며 웃었다. 방금까지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이 어느새 밖으로 삐져 나와있다. 네 손가락 끝도 벚꽃잎으로 물이 들어버렸다. 나는 그 손을 맞잡아 꽉 쥐곤 내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네 거짓말을 알게 해주는 따끈한 손이 나를 다시 웃게 했다. 너를 알고, 나는 웃지 않았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가는 길 마다 흐드러져 있는 벚꽃나무에 나는 기분이 더욱 더 들떠버렸고 너와 함께 손을 잡고 걷는 이 순간을 견딜 수 없어 나무 아래 벤치를 가르켰다. 가람아, 우리 조금만 쉬다 가자. 너는 그런 날 올려다 보다 그럼 그러자, 대답을 했을 뿐이었다. 가만히 앉아 꽃잎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조금, 떨어져 앉아있는 거리가 시려 나는 네 곁으로 바짝 달라붙어 앉았고 너는 또 뚱한 표정을 지으며 발 아래 꽃잎들을 툭툭 차댔다. 나는 그런 널 바라보다 여전히 주머니 안에 쥐고 있는 손을 꽉 쥐었다가 매만졌다. 조금 차이가 났던 두 손의 온도가, 어느새 비슷해져 있었다. 여전히 발장난을 치고 있는 널 바라보다 네 귓가에 내려앉은 꽃잎이 눈에 띄었다.

 

나는 여전히, 너를 좋아하고 있다.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고 사소한 것이었다. 너를 만나던 해의 봄,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의 주술에 벚꽃나무 가지로 몇 번이나 묶여야 했던 그날. 그날도 지금처럼 네 귓가에는 벚꽃잎 하나가 내려 앉아있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네 귓가에 내려앉은 꽃잎을 떼어내려 손을 뻗은 순간, 네가 내 눈 안으로 들어왔다. 내 손길에 움츠러든 작은 어깨, 그 덕에 함께 눈에 들어왔던 유난히 희던 목, 노을빛을 받아 꽃잎보다 붉게 달아올랐던 볼까지. 서스럼 없는 여느 남자애들처럼 지내 언제고 볼 수 있던 그 사소한 것들이 다른 기분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 꽃잎을 떼어내며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들이마신 너는 내 목을 조르고, 내 머리를 너로 가득 채워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했다.

 

 

 

 

'뭐, 뭐하는거야!'

 

 

 

 

 너는 꽃잎을 잡기 위해 내 손이 닿았던 귓가가 가렵다는 듯이 긁어댔지만 네 손에 의해 발갛게 달아오른 귓가를, 나는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늘 보았던 사소한 풍경이 큰 감정으로 다가오던 순간. 나는 여전히 잡고 있던 꽃잎이 으스러지도록 꽉 쥐곤 멋쩍게 웃었다. 너는 그 길로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지만, 나는 짓이겨 손 안에 옅게 물든 꽃잎을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가람아, 그때 기억나?"

 

 

 

 

 나는 네 곁에 앉은 널 바라보며 묻는다. 내 말에 바닥을 향하던 눈이 내게로 옮겨온다. 나는 그 잠시에도 또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었다. 너는 여전히 뚱한 표정을 지으며 이제는 지겹다는 듯 한 말투로 내가 할 말들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몇 번을 얘기하는 거야? 귀에 딱지 앉겠다. 작년 이맘때, 벚꽃잎 떼 주던 그날부터 나 좋아했다며! 전 같으면 온 몸이 근질대서 그런 말은 죽어도 못하겠다고 소릴 질렀을 텐데. 나는 어느새 표현이 자유로워진 널 보며 웃었다. 아아, 아직 그 뚱한 표정을 보면 한참은 남은 것 같지만. 나는 널 바라보며 대꾸한다. 응, 맞아. 그때. 네가 참을 수 없이 좋아졌던 날. 넌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말야. 넌 이제 지겹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나지도 않는 땀이 손에서 난다며 손을 잡아 빼었다. 부끄러워 죽겠다고 온 몸으로 표현하는 널 바라보며 어느새 발갛게 달아오른 네 귓가를 눈에 담는다. 다시, 가슴 한 켠이 두근거린다.

 

 

 

 

"야, 주은찬"

 

 

"응?"

 

 

 

 

 두근대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을 때쯤, 네가 나를 불렀고 나는 그런 네게 대꾸하기 위해 널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발 끝을 가르킨 너는 내가 그 손가락 끝을 바라보는 것을 보곤 일어서 먼저 걷기 시작했다. 발 아래 떨어져 있던 네 주변의 꽃잎들은 네 발 아래 다소곳이 모였다. 울퉁불퉁, 하지만 꽤나 정교한 모양의 하트. 나는 또 웃음이 샌다. 나는 들뜨는 마음을 숨기지 않으며 웃어대다 혼자 멀어지는 너를 보곤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찰칵, 하는 소리에 너는 좀 더 멀어진다. 나는 네 곁으로 달려간다. 너는 달려오는 내 소리를 듣지 않으려 귀를 막고는 아, 아, 아- 소리를 내지른다. 네 손 안에 가려진 붉게 물든 귓가를 보다 귓가를 틀어막은 손을 잡아내려 맞잡는다.

 

 

 

 

"손, 잡고 걸을래."

 

 

 

 

 너는 입을 꾹 다물곤 가만히 손을 내어준다. 아까와 다른 나른한 바람이 불어온다. 너와, 그런 네 손을 맞잡은 나에게로 꽃비가 쏟아진다. '손…, 잡고 걸어도 돼?'가 아닌, 말없이 손을 맞잡을 수 있는 나날들이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랑해, 가람아."

 

 

"…나도."

 

 

 

봄과 벚꽃과 청가람. 이렇게 또 나의 봄이 이어져간다.

 

둥굴레차!/etc | Posted by 윤새벽 2015. 1. 23. 16:11

[백청주] 本色 - 上


"너는 화도 안 나냐?"

 나는 주은찬이 무섭다.

"괜찮아"

 녀석이 꽁꽁 싸매고 있는 그 속 안엔, 어떤 모습의 녀석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本     色 

 주은찬과는, 함께 한지 어언 8년이 다 되어가는 8년지기 친구다. 조금 후엔 10년, 사신이 되어 함께 간다면 그 햇수를 세릴 수도 없겠지. 하지만 나는 주은찬을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남들도 볼 수 있는, 질리도록 착한 녀석의 모습일 뿐이니까. 주의의 사람들보다 조금 더 안다고 할 수 있는 녀석의 모습은, 같은 사신후계자의 길을 걸으며 평범한 인간들에겐 할 수 없는 이야기의 '일면'일 뿐이다. 남들에게 알릴 수 없는 비밀이나 속내가 아닌, 특정한 주제를 이해할 수 있는 녀석에 한한 이야기의 공유일 뿐이란 것이다. 나는 단 한 번도 녀석이 무너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남자 후계자란 이유로 집안 어른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때도, 양기가 강해 주술을 다루는 것이 힘들 것이란 말을 들었을 때도, 수백번을 다쳐가며 수련해도 완성이 되지 않는 주술에도 녀석은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지금 키의 반쯤 될까하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녀석은 늘 비슷한 정도의 서글한 웃음으로 모든 것을 무마했다.

 주은찬은 질리도록 착하다. 주은찬을 아는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녀석의 속 안엔 전혀 다른 녀석이 살고 있다. 나 또한 영원이란 시간동안 주은찬을 마냥 착하기만 한 녀석 중 하나로 알고 있을 뻔 했으나, 나는 그 진모습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너는 화도 안 나냐?"

 어린 시절 스치듯 겪었던 녀석에 비추어보자면, 녀석 또한 지독히도 착한 호구는 아니었다. 열 서너살쯤 되었을 때의 일이던가. 나를 만나고도 1~2년의 시간이 흐른 후였지만 여전히 주술 하나를 겨우 익힌 -그것도 보패를 사용해서만-녀석을 두고 주작가는 여전히 말이 많았다. 주은찬이 태어나기 전, 늘상 여자가 많이 태어나는 주작가에선 이례적으로 여자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았고, 그나마 태어나던 남자아이도 너무 약하거나 금방 죽어버렸다고 했다. 그 후 전신이 붉은 주은찬이 태어나고 나서야 주작가에선 아이들이 하나둘씩 태어났으나 머리가 붉은 여자아이는 태어나지 않았다. 가문 내에서는 아무것도 모를 어린 녀석을 앉혀두고 늘상 말이 많았다고 했다. 주은찬이 진정으로 사신이 되어 인간세계를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 겨우 글을 깨칠 나이부터 녀석은 주술을 배워야 한다며 강요받았다고 말했다. 여자 주작후계자들은 주술을 몸으로 익혀 자유자재로 다루지만 넌 그럴 수 없으니 하고, 하고 또 해야 한다고. 그렇게 보패의 힘을 빌어 겨우 삼매진화를 깨친 11살의 겨울, 녀석은 '이제야 하나를 배울 줄 알았다면 일찍이 죽여버렸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괜찮아. 어른들이 모이면 늘 하는 말인걸…."

 녀석이 했던 무수한 노력을 알던 난, 그 말을 듣고 내 일보다 더 화를 냈지만 녀석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그 말을 내뱉곤 나를 앞서는 녀석의 등을 바라보며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었다. 저런 호구같이 착한 성격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을 했던 나날도 있었다. 좋아도, 당황해도, 슬퍼도, 울 것 같아도 녀석은 늘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자릴 피했다.

"너 그러다 홧병으로 죽겠다!"

 나는 녀석의 등을 보며 소리쳤지만 녀석은 그저 눈 앞에 떨어지는 벚꽃잎들을 바라보았다. 방학 중이 아닌 날 녀석이 오는 건, 그렇게 심한 일이 있거나 주술을 좀 더 사용할 수 있게 된 날들 뿐이었다. 물론, 후자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녀석이 온다는 소릴 들으면 먼저 걱정부터 되었었지만. 씩씩대는 나와 반대로 조용히 벚꽃나무 곁으로 걸어가 나무에 손을 댔다. 쌔,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꽃잎들은 힘없이 떨어졌고 나는 그 장면에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아 녀석이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빽건"

"왜"

"나도 인간인데, 화가 날 때가 많아. 특히, 그런 소릴 들을 때면. 내 손은 더럽히기 싫으니 니 스스로 죽어달란 소리랑 뭐가 다르냐고."

 나는 뒤돌아선 주은찬의 표정을 볼 순 없었으나 분명, 슬퍼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선택할 수 없는 운명으로 태어나 수없이 노력해도 끊임없이 부정 받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겨우 12살이 되려는 겨울, 그렇게 어린 생각으로도 주은찬의 상황은 늘 안쓰러웠고 가슴 아파 했었다.

"대신, 그렇게 화가 날 때면 나는 그 분이 가실 때 손을 꼭 잡아드려."

 가슴 아파, 했었다.

"그럼, 내 손에 닿은 거니까, 밀치기만 해도 그런 소릴 하는 사람은 없어질테니."

 녀석은, 그 말을 끝으로 고갤 돌려 날 바라보곤 맑게 웃었다. 보패를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녀석의 귓가가 주술을 부릴 때 처럼 일순 불타오르는 것 같이 보였다. 나는 순간 불어왔던 바람이 왜 그렇게도 싸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바람 앞에서 흔들리다 떨어져 내리는 벚꽃잎들이 모두 불씨로 보였다. 나는 주작이 그렇게나 붉은 존재였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녀석이 가장 처음으로 익힌 주술, 삼매진화. 녀석이 그 주술에 대해 설명하던 때가 떠올랐다. 손에 닿았던 물체가 충격을 받으면 폭발해 버린다고,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조잘대던 녀석의 모습이 녀석의 웃는 얼굴과 겹쳐져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늘 웃기만 해대던 얼굴 안에 감추어진 녀석의 본심은, 그 한마디의 말로 수면위로 얕게 떠올랐다. 그 후, 주은찬을 대하는 내 태도는 묘하게 바뀌었다. 정확히 말하면, 속을 알 수 없는 그 녀석을 무서워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가 녀석이 생각하는 정도인지, 꿈에도 알 수 없어 무서웠다.

"가람아, 내가 도와줄 거 있어?"

 그렇기 때문에 그 속을 모를 녀석이 내 것을 건드리려 하는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눈을 빛내며 녀석의 행동을 쫓고 있다. 나는 녀석의 웃음이 무엇을 감추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녀석의 본심이 얼만큼 어둡고, 얼만큼 삐뚤어진 것인지는 몰라 무섭기는 하지만 녀석의 웃음을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내 것의 곁으로 다가오는 웃음을 마냥 앉아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에 감아올리는 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 이야기하려는 몸, 내 것을 볼 때마다 웃고 있는 위험한 얼굴까지. 자신을 향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를 내 것은, 이런 내가 괜히 예민하며 타박하지만, 다른 이들을 대할 때와 묘하게 달라지는 그 녀석의 웃음은 그날 벚꽃아래 지어주었던 미소와 닮아있는 것이었다.

"혼자 하는 게 더 맘 편하니까 저리 가있기나 해"

"에이, 그래도 도와주면 빨리 끝날 거 아냐"

"그럼 반찬이나 좀 날라두던가"

"응, 그럴게"

 녀석은 여전히 싱글벙글인 채로 반찬을 옮겨다 날랐다. 내 곁을 지나가던 주은찬은 가만히 서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보곤 웃으며 말했다. 빽건, 너도 도울래? 얼른 가람이가 해준 밥 먹자. 녀석의 사람 좋은 듯 한 웃음은 여전히 입에 걸쳐져 있었으나 나는 사람들의 눈이 없는 곳에서 청룡을 바라보는 주은찬의 미소를 본 적이 있었다. 쳥룡의 뒤를 쫒다 낮게 눈을 내리깔곤 웃는 그 모습을. 그것은 평소의 웃음과는 달랐다. 저 웃음은 무슨 의미일까. 나는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널 몰라. 그래서 네 웃음의 의미도 몰라. 하지만, 짐작은 가. 내 것을 빼앗지마. 짐승을 닮아 날카로운 감이 말했다. 확증은 없을지라도, 지금 짓는 져 녀석의 웃음은 소유를 원하는 눈빛이라고.

"주은찬"

"응?"

날 바라보는 얼굴은 여전히 웃는 모습이었다.

"내거야"

"뭐가?"

"더 다가가지마. 손도 뻗지 마. 눈에 담지도 마. 내 것에 손을 대는 건, 너라도 용서 못 해"

 녀석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빛을 하곤 날 바라보았다. 저 눈빛이 가증스럽다. 나는 착해. 나는 결백해. 너는 이런 날 알고 있잖아. 누가 더 잘못한 것 같아? 늘 착한 내가 잘못하기라도 했을 것 같아?하고 말하는 듯 한 저 눈빛. 녀석은 누구에게나 손가락질을 받는 어린 시절을 겪으며 살아남을 스스로의 방식을 만들었다. 다른 이들의 눈 안에 비취지는 착한 이미지 안에서, 타인의 손으로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몰아세웠다. 자신이 비난하는 방법보다 남의 손으로 자신을 뭉개는 타인을 비난 하는 방법이 더욱 확실하니까. 그렇게 누구에게나 착한 척을 해대며 자길 감추는 모습은 날이 갈수록 더욱 견고해져만 간다. 방심하고 있을 때를 노리지 않으면 평생 모를 철저함으로 녀석은 자신을 숨겼다. 그런 가증스러운 눈빛으로 으르렁대며 이를 내보이는 날 바라본다. 이런 내가 전혀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듯 날 보던 녀석은 눈을 두어번 깜박이고 나서야 웃음을 터뜨린다.

"뭐야. 별거 아니네, 빽건"

 녀석은 웃고는 내 귓가로 다가와 소근거렸다.

"나는 빼앗을 자신이 있어. 넌 지킬 자신이 없나보지?"

 ​

 녀석은 그 말을 남기곤 내 귓가에서 떨어졌다. 가까웠던 거리를 제자리로 돌리며 웃음을 지웠다. 나는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숨겨온 진짜 녀석의 모습이 얼굴에 비춰졌다. 나와 눈을 마주하고 있었으나 내리깔아 보는 듯 한 눈빛으로 표정을 굳힌 녀석의 얼굴은, 어쩌면 평생 볼 수 없었을 모습이기도 했다. 완전한 무표정. 하지만 그 안엔 무수한 감정이 들어있었다. 그 안엔 나에 대한 질투, 나를 향한 견제, 청룡에 대한 애증과 소유욕, 내가 먼저 청룡을 가졌다는 것에 대한 열등감과 분노가 한데 섞여 있었다. 이래서 네가 늘 웃었구나. 이 모든 것이 그렇게도 여실히 드러나니까. 나는 그제야 녀석이 짓는 웃음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잠시간의 표정을 다시 감추며, 녀석은 웃었다. 저녁 늦어지면 배고파. 가람이가 기다리겠다. 얼른 가자. 녀석이 웃지 않는 그 순간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는 녀석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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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해, 가람아”

 

 

 그 후로도 변한 것은 없었다. 그저 잔잔한 하루들의 연속이었다. 은찬은 여전히 조용한 눈빛으로 가람의 뒷모습을 쫒기에 바빴고, 가람은 그 눈빛의 의미를 알고 있음에도 평소처럼 은찬을 대했다. 은찬의 행동에 과하게 반응하지도 않았으며 부러 모른 척 하지도 않았다. 은찬은 그런 가람을 보며 가만히 웃을 뿐이었다. 은찬의 고백 아닌 고백은 평소와 같은 하루의 한 조각이었다는 듯이, 하루는 그렇게 흘러가고, 흘러갔다. 현우와 건, 넷이 함께 부대끼며 여느 날처럼 투닥거리는 날들이 계속 되었다. 그 행동들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둘의 사이엔 어떤 미묘함도 자리 잡지 않은 듯 보였다.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지만.

 

 달빛이 길 곳곳에 내렸던 날 밤, ‘산책 다녀오지 않을래?’하던 은찬의 말에 길을 걷다 발견한 곳은 놀이터였다. 밉지 않은 쇳소리가 나는 그네에 앉아 하얀 입김을 내뱉던 가람은 좋아해,라는 은찬의 말에 그제야 눈을 맞추었다. 조용하다 못해 고요했던 장면 중에서 유일하게 일렁이던 눈동자를 한참이고 바라보던 가람은 그저 ‘가자’며 발을 땠을 뿐이었다. 좋아한다 말하던 은찬의 눈은 한치의 거짓도 없었다. 가람은 그런 은찬의 눈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고,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찬이 마음을 고백하던 날 이후로 둘의 사이에 변한 점이 있다면 둘이 함께일 때만 묘하게 바뀌는 가람의 행동이었다.

 

 

 

 

 

 

 

 

 

일상, 평온의 나날

 

 

 

 

 

 

 

 

 

 

“뭐야, 왜 안자고 기어나와 있어?”

 

 

 가람은 툇마루에 나와 앉아있는 은찬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맨발아래 닿는 마루가 마냥 차가웠다. 가람이 은찬의 대답을 기다리며 팔짱을 꼈다. 여전히 내려다보는 표정이었지만 은찬은 그런 가람이를 올려다보며 웃어주었다.

 

 

 

“그냥, 잠이 안와서. 가람이 너는?”

 

“나도 그냥. 잠이 안와서”

 

 

 

 은찬은 그런 가람을 보며 우리 통했네,하며 웃었다. 그날과 같은 둥근 보름달이 비치는 밤이었다. 구름 한 점은 커녕, 별도 보이지 않도록 달이 밝은 밤이었다. 가람은 그새 자신에게서 시선을 거두는 은찬을 보다 멀지 않은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은찬이 앉아있는 모습 그대로 다리는 마루 아래로 내리고 양 팔을 제 옆으로 뻗어 몸을 기대었다. 은찬은 제 곁에 앉는 가람을 느끼곤 마루 아래로 내린 두 다리를 동동거렸다. 날이 제법 차다, 그렇지, 가람아? 이제 곧 겨울인가 봐. 은찬은 아리도록 밝은 달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가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은찬은 움직이던 다리를 멈추곤 대답이 없는 가람을 바라보았다. 가람은 은찬을 바라보던 시선이 맞닿자마자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앉은 거 똑같아, 은찬은 생각했다.

 

 

 

“엄마새 따라하는 아기새 같잖아”

 

“뭐?”

 

“아냐~”

 

 

 

 아, 할 말이랑 생각이랑 반대로 해버렸다.

 

 당황해 어물쩡 넘어가는 은찬의 말에 가람은 얕게 인상을 찌푸렸으나 굳이 자세를 바꾸진 않았다. 은찬의 말에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한 번 내려다보았을 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둘은 한참이고 그렇게 앉아있었다. 제법 찬바람이 둘의 사이에 맴돌았으나 옅게 느껴지는 온기에 춥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은찬은 고개를 까딱이며 흥얼대다 맑기만 한 하늘을 보며 가사를 입혀갔다.

 

 

 

“네가 숨쉬면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네가 웃으면 눈부신 햇살이 비춰. 여기 있어줘서 그게 너라서 가끔 내 어깨에 가만히 기대주어서. 나는 있잖아 정말 빈틈없이 행복해. 너를 따라서 시간은 흐르고 멈춰.”

 

 

 

 가람은 은찬의 목소리에 마루아래에 두었던 다리를 끌어모아 안았다. 은찬의 노래가 이어질수록 가람은 두 무릎 사이에 제 얼굴을 묻었다. 무릎 위에 이마가 닿아 얼굴이 가려졌다. 은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노래를 이어갔다.

 

 

 

“물끄러미 너를 들여다보곤 해.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너의 모든 순간, 그게 나였으면 좋겠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차올라 나는, 온통 너로.”

 

 

 

 은찬의 노래가 끝나고도 가람은 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졸린걸까,하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뻗은 은찬이었지만 갑작스레 일어나는 가람의 행동에 은찬은 가람을 또 올려다보았다. 가람은 입술을 앙다문 표정이었다. 아, 귀가 빨갛다. 추웠나? 은찬은 가람의 표정을 읽으려 노력하지는 않았으나 다른 곳과 달리 새빨간 귀가 눈 안에 들어왔다. 추워? 그럼 그만 들어가자.하며 말을 하려 입을 때려는 찰나,

 

 

 

“나도”

 

 

 

 하고 방으로 휘적휘적 들어가는 가람을 보며 은찬은 미닫이문이 열리고 닫길 때 까지 그저 가람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가람의 말을 이해한 은찬은 가람이 했던 것처럼 두 다리를 끌어모아 안고 고개를 묻었다. 그래서 귀가 빨갰구나, 귀여워…. 은찬은 제 무릎 위에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부비대었다. 가람의 머릿속이 들여다보일 것만 같았다. 이상해, 두근거려. 이게 뭐하는 거야? 들키고 싶지 않아, 그치만…, 좋아. 은찬은 웃음을 터뜨리며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가람이가 정말 이렇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

 

 

 

 

 

 학교를 가는 은찬과 학교를 가지 않는 현우 덕에 은찬과 가람만이 있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중앙에 백은이 오던 날 처럼, 건이 현우와 함께 나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중앙에 오롯이 둘만이 남는 경우는 드물었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여자들이 아닌데도 둘만 있는 시간은 턱없이 적었다. 그에 이렇다한 불만을 토로하는 둘은 아니었으나 둘만 있는 시간을 마냥 버리지도 않았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나른한 휴일,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가람은 잠이 들어버려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은찬을 두고 현우와 건의 앞에서 좀 떨어진 곳의 마트에서 하는 세일을 놓치면 안 된다고 닦달을 해댔다. 그 결과 현우와 건은 입을 주욱, 빼면서도 중앙을 나섰고 황순할멈도 옆집에 마실을 나가 가람은 간만에 조용한 주말 저녁상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보글보글 대며 찌개가 끓어오를 무렵, 마지막에 넣을 야채를 손보던 가람의 허리 사이로 팔이 감겼다. 그에 놀라 헛손질을 할 뻔 했던 가람은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곧 제 어깨에 내린 은찬의 얼굴 덕에 멍하니 떠있는 손만을 내려다보았다.

 

 

 

“뭐야, 자는 거 아니었어?”

 

“깼어…, 방금. 응, 방금….”

 

 

 

 아직도 잠에 취한 것인지 횡설수설해대는 은찬을 그렇게 두고 가람은 썰던 재료를 마저 썰기 시작했다. 가람의 어깨에 이마를 대곤 가만히 숨을 고르던 은찬은 가람의 어깨에 턱을 괴고는 가람이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통, 통, 통 하며 썰리는 애호박은 굵기도, 크기도 일정했다. 신기하단 말야, 나랑 같은 나이인데 솜씨는 주부급이라니까. 가람의 손 아래에서 썰어지는 야채들을 바라보다 은찬은 가람을 조금 더 꽉 끌어안고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야.”

 

“…….”

 

“주은찬”

 

“…음…, 방해 돼?”

 

 

 

 여전히 낮게 잠겨있는 은찬의 목소리가 가람의 귀 아래에서 울렸다. 가람은 야채를 썰던 손을 우뚝 멈추었다. 여전히 반쯤 잠에 취해 색색대던 은찬은 규칙적으로 들리던 도마와 칼이 맞닿는 소리가 멎은 것을 보곤 방해가 되었나 싶어 고개를 들며 가람의 허리에 감았던 손에 힘을 조금, 풀었을 때였다.

 

 

 

“또 해봐 그거”

 

“…응?”

 

“그때…, 밤에 했던….”

 

 

 

 …노래….

 

 점점 사그라드는 목소리로 가람은 말했다. 그 덕에 은찬은 가람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곱씹어 생각해 보아야 했다. 밤에 했던? 노래? 아직 덜 깬 정신을 불러오려 머리를 두어 번 털어내고 나서야 가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됐다. 노래를 불러달라고 한 거야? 가람이가? 그제야 놀라 잠이 깬 은찬은 고개를 돌려 가람을 바라보려 했으나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 건가 싶은 가람이 손을 먼저 움직였다. 통, 통, 통 또 규칙적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글보글 대는 찌개소리도 부엌의 정적을 채웠다. 은찬은 제 귀에 닿은 가람의 귓가에 따끈히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작게 웃었다. 아, 귀엽다니까. 은찬은 가람을 다시 꽉 안고는 가람의 어깨에 다시 턱을 괴었다.


 

 

“아무리 조심해도, 애써도. 아무리 아닌 척 밀어내도 이미 난 네가 좋아. 보고싶다, 달려간다, 두드린다, 넌 놀라 웃는다. 동그란 웃음 온 세상 다 어루만진다. 울지마라 가지마라 이제는 머물러라, 내 곁에. 넌 따뜻한 나의 봄인걸.”

 

 

 

 은찬의 목소리가 이어지며 가람은 썰고 있던 손짓을 멈추었다. 바짝 안아 맞대어진 몸 때문에 은찬은 가람이 숨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길게 들이쉬고 내쉬어지던 호흡은 은찬이 내 쉬는 호흡에 맞추어 변해갔다. 같은 템포로 호흡을 하며 은찬은 웃었다. 가람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으나 움직이지 않고 있는 손만으로도 가람의 표정이 눈 앞에 그려졌다.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제 노래를 듣고 있을 가람을 생각하니, 은찬은 가슴 한 구석이 빠듯해졌다. 아니야, 조금 더 좋아해주고 있으면 좋을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은찬은 가람의 몸에 닿는 손끝으로 가람의 배를 가볍게 쓸었다.

 

 

 

 “아직 망설이는 네 마음 앞에 그래도 멈추지 못할 내 마음. 내게 남은 두려움, 너를 안고 안아 내 품이 편해질 때까지. 울고 있다, 참고 있다, 고갤 든다, 아프게 웃는다. 노을 빛 웃음은 온 세상 물들이고 있다. 울지마라, 가지마라, 이제는 머물러라 내 곁에. 넌 따뜻한 나의 봄인 걸.”

 

 

 

 가람은 숨마저 죽이곤 은찬의 노래를 들었다. 은찬의 노래를 들을 때면 가슴 한 구석에 간질거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래도 듣고 싶었다. 노래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야채를 썰던 손을 앞치마 앞에 가볍게 닦아내곤 제 허리에 감겨있는 은찬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그 동작에 맞추어 가볍게 웃는 은찬의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마침내 만나게 된 너는 나의 따뜻한 봄이다.”

 

 

 

 자글자글 끓고 있던 찌개는 어느새 바닥을 내보이며 끓어올라 있었다. 하지만 가람은 불을 끄지도, 물을 더 넣지도 않았다. 은찬의 노래가 끝나고도 한참 후 까지 가람은 은찬에게 안긴 그대로 기대어 있을 뿐이었다. 조금 불규칙해진 숨소리가 들릴까 가람은 은찬의 있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큰 숨을 내쉬었다. 은찬은 그런 가람을 보곤 다시금 웃으며 져지 사이로 애타게 보이는 목덜미에 입술을 내렸다.

 

 움찔, 하는 가람에 은찬은 웃으며 가람의 귀 아래 입을 맞추곤 안고 있던 손을 풀어 가람을 돌렸다. 은찬의 머리칼만큼이나 빨개진 얼굴을 한 가람은 은찬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여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가람을 웃으며 바라보던 은찬은 두 손을 올려 가람의 뺨에 대곤 가람의 시선을 제 앞으로 끌어왔다. 순간 마주친 눈에 은찬은 눈이 휘어지도록 웃었다. 가람은 화끈거리기까지 하는 두 뺨을 느끼며 눈을 꽉 감았다. 그 새 가람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마주 댄 은찬은 쪽,소리가 나게 떨어지고 나서야 손을 내려 가람의 양 손목을 잡았다.

 

 

 

“가람아, 눈 떠봐”

 

“…싫어.”

 

 

 

 가람은 여전히 눈을 꽉 감고 인상을 썼다. 그게 그렇게 부끄럽나. 빨개져 눈을 꽉 감은 그 얼굴이 마냥 사랑스러웠다. 가람이도 나랑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운거지? 마냥 귀엽다는 얼굴로 가람을 바라보던 은찬은 다시 한 번 가람의 이름을 불렀다. 가람아, 가람아, 청가람. 그제야 슬쩍 눈을 뜬 가람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가람이 애를 쓰며 바라보는 은찬의 입술은 다시금 움직였다.

 

 

 

“좋아해, 가람아”

 

 

 

 가람은 은찬에게 붙잡혀 있는 두 손목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대답했다.

 

 

 

“나도. 좋아해…, 주은찬.”

 

 

 

 

 

 

 

 

 

*

 

은찬이가 부른 노래는 순서대로 '성시경님의 너의 모든 순간', '너는 나의 봄이다' 입니다